아이는 잠옷이 없다. 정확히는 주 5일 월~목요일 밤에만 적용되는 말이지만. 저녁 샤워 후 잠옷 대신 내일 입을 외출복을 꼼꼼히 입고 침대로 올라간다. 내 체질을 닮았는지 아기 때부터 특유의 손발 끈적한 땀이란 없이 한여름을 빼곤 시리게 차가운 발이라 양말까지 신은 풀-착장 상태다. 아이의 첫 사회생활인 어린이집에 다니면서부터니 10년째 잠옷 대신 외출복을 입고 잠자리에 든다. 정말? 답답해하지 않아? 의아한 듯 묻지만,,, 익숙해진 습관은 ‘무감각술’이란 마법을 부려 어느새 당연한 편안함으로 만든다. 드레스-업 잠자리는 이른 새벽 출근을 하는 나 대신, 생후 15개월부터 시작한 아이의 등원 준비가 아빠의 담당이었기 때문이다. 첫째, 바쁜 아침시간 변수를 최소화한 편의와 효율을 위한 선택이었다. 둘째, 아이의 옷차림에 미적 요소는 배제한 채 기능성에만 충실한 아빠의 손길을 티 내지 않기 위함이었다. 이제 십대가 된 11살 아이는 혼자 샤워를 하고 옷도 스스로 고르지만 여전히 잠옷 대신 자연스레 외출복을 꺼내 입는다. 주말에만 입는 잠옷에 대해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던 네가 갑자기 궁금하다.
갖춰 입은 활동복으로 밤을 보내는 동안 아이 몸에선 최적화된 펌웨어 업데이트가 이루어지는 걸까. 또래보다 마르고 작은 몸에서 내뿜는 활동성과 체력은 놀랍다. 운전면허증 갱신 2회차가 곧 다가오는 무운전 뚜벅이 엄마를 따라 다니며 단련된 ‘굳은 살’도 큰 몫을 하겠지. 세 살부터 지하철, 버스를 환승하며 공연장과 전시관 찾았던 주말나들이로 아이의 걸음은 자연스레 나와 같은 속도로 맞춰졌다. 거의 뛰듯이 걷고 있는 아이의 걸음을 눈치채고 미안한 마음에 “힘들면 조금 천천히 걷자.”라고 하면 “엄마 괜찮아. 나 더 빨리 걸을 수 있어! 이렇게~” 꽃봉오리 같은 동그란 입으로 씩씩하게 말하며 싱긋 웃는 얼굴이 떠오른다. 정수리가 잘 보였던 아이는 이제 내 어깨만큼 자라 쉽게 서로의 눈을 맞춘다. 옆 눈으로 엄마의 위치를 확인하며 바싹 붙어 나란히 걷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겠지. 내 외투 주머니에 기어이 같이 넣고 싶어 애쓰던 작은 손도 이제 내 것이 아니다. 자기 양쪽 주머니에 무심하게 손을 찔러 넣고 내가 아닌 앞만 보고 느긋한 걸음으로 걷는 아이가 가끔 낯설다.
내 귀에만 흡족하게 조율된 악기를 연주하려 아이가 잠자리에서 누릴 넉넉하고 가벼운 잠옷의 감촉을 잊게 한 건 아닐까. 걷다 만나는 신기한 것들에 잠시 멈추는 시선을 가려버린 건 아닐까. 점심시간에 평소 즐겨 입히는 아이옷 브랜드 홈페이지에 들어가본다. ‘리미티드 에디션’을 내걸고 매 시즌별, 차수별 100% 프리오더(Pre-Order) 방식으로만 제작하는 인기 높은 곳이다. 당일배송이 대세인 요즘, 구매하고 1.5~2개월 후에나 잊을 만 할 때 짠~하고 도착한다. 그럼에도 디자인과 재질이 맘에 쏙 들어 시즌마다 빠짐없이 주문하며 기꺼이 통장잔고와 함께 스트레스를 날려버린다. 유일하게 관심주지 않던 홈웨어(실내복)를 때 맞춰 오픈 하니 이건 나를 위한 건가 싶다. ‘역시 디자인부터가 달라. 잠옷에 맞춘 헤어밴드까지 세트 구성이라니!’ 5페이지에 걸쳐 30개가 넘는 아이템들을 꼼꼼히 보며 마음에 드는 잠옷을 장바구니에 담고 나니 결제액이 매번 구매한 외출복 만큼이다. ‘그래, 잠옷은 제대로 산 적이 없으니까. 상하의스타일, 원피스 스타일 골고루 담아 뺄 것도 없네.’ 당위성을 부여하며 결제하기 클릭까지 나를 응원한다.
불문율처럼 유지했던 일상의 규칙들을 느슨히 풀고 변주를 하나씩 끼워 넣자 다짐할 때쯤 잠옷이 가득 담긴 택배 박스가 왔다. “와~ 엄마 나 친구들이랑 파자마 파티 해? 왜 이렇게 많이 샀어?” 아이는 신이 나 묻는다. 새해 11살이 되어, 겨울 방학으로 아침 시간이 여유로운 아이는 잠옷을 입는 저녁을 찾았다. 헐렁한 잠옷을 입고 달게 잔 아이는 아침에 “오케이 Google~ 오늘 날씨 알려줘!” 기온을 확인하고 기분에 끌리는 옷을 잠시 고민하다 적당히 마음에 드는 걸로 선택한다. 그래, 새학기 개학 후에도 이대로 쭉~이다! 딱 하나, 퇴근 후 다정한 인사 대신 잔소리 폭격을 퍼붓지 않기 위해 벗은 잠옷 접어놓기는 꼭 약속해두어야겠다.
February 05,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