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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인 May 25. 2023

맥주 한 캔을 처방합니다

맥주 한 캔을 처방합니다


행복 체감점을 낮춰주고 분노 한계점을 높여주는 나의 생명수, 맥주다. 퇴근길 아파트 단지 내 편의점에 들려 ‘4캔 1만 원’ 맥주를 골라 담는 것은 당연한 코스다. 동네 편의점에도 기본 냉장고 2대에 종과 횡을 꽉 채워 진열된 색색의 맥주는 보기만 해도 피로가 풀린다. 내 입에 너무 쓴 흑맥주는 처음부터 불호, 적당히 진한 맛과 독특한 향이 좋아 한동안은 Ale 맥주- 바이젠(Weizen) 스타일만 찾았다. 요즘엔 결국 ‘구관이 명관’ 한국 음식엔 톡 쏘는 탄산 가득한 가벼운 Lager 맥주지. 그중에서도 필스너(pilsener)로 고민 없이 담는다. 맥주가 좋아 1일 1캔 마시지만 상면 발효, 하면 발효, 발효 온도, 맥아 비율에 따른 미묘한 맛의 차이까지 구별하며 즐기는 애호가는 아니다. 치익~ 따깍, 맥주 캔을 따는 소리로 하루를 끝맺고 내 취향을 확인하는 순간이 즐겁다. 


출퇴근 지하철 안, 가능한 모든 방향으로 몸을 틀어 앉아있고 서있고 기대어있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내 몸도 그들 사이에서 미세한 각을 유지하며 겹치지 않게 서있다. 회사에선 책상마다 양옆과 앞을 가린 파티션이 세워져 있지만 서로의 동선과 얼굴 표정은 앉아 있는 시야에서도 쉽게 들어온다.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밀집도 높은, 시야가 확장되는 하루를 보내고 나면 무거운 피로가 발밑까지 가라앉는다. 내내 밝은 곳에 있어 수축된 내 동공과 함께 몸의 긴장도 이완시켜줄 나만의 암실이 절실하다. 주변을 나의 숨소리만으로 채우며 서서히 암순응의 시간을 거치며 나를 회복할 공간과 시간이 소중하다. 각자의 방으로 향하는 밤, 남편은 거실 TV보다도 큰 모니터를 마주하러 책상 앞으로, 잠잘 준비를 마친 아이는 읽고 싶은 책의 페이지를 조금 더 넘기러 침대로 들어간다. 나는 거실테이블에 캔맥주를 꺼내고 다이어리 또는 책 한 권을 나란히 위치시킨다. 사실 다이어리에 정리해야 할 중요한 일정이 있는 것도, 특별히 집중력이 발휘되어 책이 술술 쉽게 읽히는 것도 아니다. 머리가 띵하게 차가운 맥주 한 모금 탓일까, 손 날에 살짝 닿는 종이의 기분 좋은 감촉마저 느껴지는 고요함과 나른함이 좋다.


국은 물론 식사 후 물조차 마시지 않는 뻑뻑한 식습관의 소유자인 나에게 정기적 수분 섭취는 커피와 맥주뿐이니 생명수라 할만하다. 물기 없는 밤고구마를 넘길 때의 목 막힘은 괴로움이지만, 맥주를 입안 가득 채워 한꺼번에 넘길 때 순간 느껴지는 목의 뻐근함과 숨 막힘은 짜릿하다. 요즘 음식뿐 아니라 거의 모든 단어 앞에 ‘마약-‘ ‘인생-‘이 자극적으로 붙는다. 과장되고 억지스러운 표현에 거부감이 들다가도 맥주에 대입해 보고는 수긍하며 너그러워진다. 저녁마다 찾는 맥주가 걱정되는 건 사실이지만 매년 건강검진 후 이보다 더 깨끗, 간결할 수 없는 결과통보서를 받으면 내 몸에 대한 불안과 죄책감은 사라진다. 각종 검사 항목의 수치는 정상 범위 내에서도 한가운데 수치를 가리키니 보란 듯 당당해진다. 현재 건강 상태에 ‘일일 일맥(주)’ 정도는 피로회복제, 비타민 수액 정도로 봐도 되지 않을까 합리화하며 말이다. 야근 후 퉁퉁 부은 발이 구두에 들어가지 않아 도로시 구두의 마법처럼 탁탁탁 부딪쳐 슝 집에 도착했으면 하는 날, 샤워 후 스스로 처방한 맥주 한 캔은 산삼 한 뿌리 효능에 뒤지지 않는다.


아이와 굿나잇 인사를 하고 한겨울 밤에도 포기 못한 차가운 맥주를 냉장고에서 꺼내 기어이 침대 안으로 들어간다. 치익~ 따깍, 숨길 수 없는 캔맥주 따는 소리와 동시에 귀 밝은 아이의 잔소리가 들려와 혼자 민망한 웃음을 짓는다. 맥아 홉 효모 물, 단순한 구성만으로 완벽한 조합의 결과물인 맥주를 마시며 내 일상을 이루는 4대 구성요소를 떠올려 본다. 가족 회사 글쓰기,,, 친구? 더는 생각나지 않을 만큼 나의 삶 역시 단조롭다. 90%가 물인 단순한 보리음료가 특유의 향과 맛을 가진 수백 종의 맥주가 되는 것은 효모에 의한 발효 과정을 거치면서 일 것이다. 삶 속에서 풍성한 맛과 향이 나도록 발효시키는 나의 효모제는 성실과 꾸준함일 수 있다. 똑같은 하루의 반복인 듯 보이지만 그 안에서 나만의 효모- 성실과 꾸준함의 온도와 농도를 달리하며 하루는 진하게 하루는 톡 쏘듯 가볍게 채워나간다. 2500원 맥주 한 캔으로 나 홀로 철학을 배우는 밤이다.


March 12,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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