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 진동이 울림과 동시에 화면을 본다. 정직한 반명함판 구도, 초록나무를 배경으로 파란 스트라이프 셔츠를 단정히 입은 익숙한 사진이다. 발신자를 알려주는 화면 가운데 '아바마마' 네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하루에 한 번, 주말엔 두 번도 걸려오는 아빠로부터의 전화다. 친절하지 못한 무심한 드래그로 통화를 연결하며 반가운 기색 없는 "네~"로 인사를 대신한다.
알람처럼 매일 걸려오는 아빠의 전화는 너무도 당연한 일상이다. 언제부터였을까, 작정하고 거슬러 올라가 보자. 대학생 때도 아빠는 귀가 시간을 체크하는 엄한 존재였지 매일 목소리를 들으려 전화하는 다정한 분은 아니셨다. 그렇다면 23살, 상해 어학연수 시절이 시작이었을지 모르겠다. 꺾인(?) 20대가 되어 회사를 다니며 사회생활을 시작했어도, 혼기를 꽉 채워 서른을 눈 앞에 둔 나이에도 아빠의 전화는 변함없었다. 늦은 술자리는 물론 여행지에서도 "야, 아바마마 전화 왔어!" 하루 한 번 핸드폰 화면에 뜨는 발신자 '아바마마'와의 통화는 친구들에게도 익숙한 일이었다. 첫 핸드폰이 생긴 후 20여년 동안 같은 이름으로 저장한 덕에 난 '아바마마'로부터 성은이 망극한 안부 전화를 거의 매일 받았던 것이다. 문제는 전혀 은혜롭게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겠지. 매일 같은 질문, "집에 왔니?" "저녁은 먹었니? 사위는 퇴근했고?" "하린인 뭐하나?" - 네. / 지금 먹고 있어요. / 별일 없어요. / 잘 지내요. 아무리 답안을 나열해도 오지선다가 채 되지 않는 문답이 통화의 전부이다. 이 단순하고 반복되는 통화 속 아빠의 바람은 무엇일까.
아빠 전화의 원조 수신자는 할아버지 할머니일 것이다. 퇴근 후 씻자마자(주말이면 아침에) 쇼파에 앉아 매일 빠짐없이 "식사 하셨어요?"로 시작하는 통화 모습이 생생하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청력이 좋지 않아 아빠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보청기 좀 잘 쓰시라는 잔소리로 끝맺는 걸 들으며 '안부를 묻는 거야, 화를 내시는 거야? 왜 괜히 전화하셔서는,,,'라는 생각도 했다. 대학교 강의실에서였나, 핸드폰에 뜬 모르는 번호를 우연히 받았는데 할머니 목소리라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네 아빠에게 무슨 일이 있냐며, 요 며칠 전화가 없어 큰일이 있구나 싶어 전화했다 하셨다. 일흔이 넘은 노모께서 매일 전화하는 '큰애'가 2-3일 전화가 없자 수첩을 한참 찾아 손녀 핸드폰 번호를 누르신 거다. 그 날이 할머니께서 내게 직접 거신 처음이자 마지막 전화였던 건 당연하다. 이런 상상이 나쁠지 모르지만 언젠가 아빠의 부재가 오면 우리 가족은 물론, 주변의 지인들도 아빠의 일방적이고 잦았던 통화를 그리워하진 않을까. 귀찮게 느꼈을 특별한 내용도 없는 그 안부 전화를 말이다. 특유의 높은 톤의 튀는 목소리가 문득 문득 듣고 싶지 않을까? 난 분명 그럴 것 같다.
아바마마의 전화에 변화가 있다면 손녀가 생기고 아니, 정확히 손녀의 핸드폰이 생기고 '우리딸 세실리아' 대신 '예쁜 손녀 테리'가 통화 목록을 채운다는 것이다. 동시에 아이는 매일 핸드폰 화면에서 '범박동 할아버지'를 확인한다. 때마다 울리던 핸드폰 진동이 현격히 줄어 편해진 한편 나의 귀찮음을 아이에게 떠넘긴 게 아닌가 하는 미안함도 든다. 그러나 어쩌겠니. 할아버지의 변함없는 사랑과 관심인 것을. 생각해보니 요 며칠 아빠에게 전화가 없던 거 같아 바로 아이에게 묻는다. "범박동 할아버지랑 통화한 적 있어?" "응, 아까 낮에 학원 가기 전에 전화 와서 9분이나 통화했어." 9분을 강조하는 너의 말에 웃음이 나온다. 별일 없으시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며 '그래, 잘 했어.'라고 우리만 알 수 있는 칭찬을 할 뻔 한다. 오늘은 내가 먼저 '아바마마'에게 문안 인사를 드려야지. 아빠 핸드폰 화면에 '우리딸 세실리아'가 뜨게 해야지. 조금 놀라신 말투로 "왜, 무슨 일 있니?"부터 하실지 모르겠다. 그럼 나도 "식사는 하셨어요?"라고 인사를 대신한 첫 마디를 꺼낼 것이다.
December 18,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