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다닐 때 책가방이 무거웠다. 지금 학생들이 드는 것 같은 배낭이 아니라 손으로 드는 가방이었다. 버스를 타면 좌석에 앉아있는 사람이 옆에 서 있는 학생의 책가방을 들어주는 건 불문율이었다. 앉아있는 사람이 학생이면 말할 것도 없고 일반인이라도 마찬가지였다. 앉은 사람이 들어주겠다는 뜻으로 손을 내밀면 남학생들은 사양하기도 했지만 보통은 바로 가방을 내밀어 그 사람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누군가가 앉아있는 좌석 앞에 설 때는 그 사람이 가방을 들어주리라는 데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가방을 달라는 손짓을 하지 않으면 염치 불고하고 이것 좀, 하고 가방을 내밀기도 했다. 그럼 대부분은 얼른 받아주었다.
운 좋게 앉는 아이가 있으면 남학생들은 앉아있는 아이에게 같이 가는 친구들의 책가방을 있는 대로 다 갖다 맡겼다. 크고 묵직한 가방을 무릎 위에 대여섯 개는 쌓아 올려 앞도 보이지 않게 만들며 낄낄댔다. 버스가 좌로, 우로 돌아가면 몇 개나 되는 가방이 하나라도 떨어질까 단단히 붙들어야 했다. 많은 가방에 짓눌린 친구가 나 차라리 일어날래, 하고 몸을 일으키려 하면 안 돼, 하고 쌓여있는 가방 위를 꽉 눌렀다.
중학교 때 학교 버스 안에서 여학생들도 장난을 많이 쳤다. 서서 가는 아이들의 가방은 당연히 앉은 사람이 들어주었다. 이런저런 친구들 이야기, 어느 선생님의 특별한 언행과 말도 안 되는 단체 벌을 받은 경위 등을 세세하게 주고받느라 버스 안은 항상 재잘재잘, 시끌시끌했다. 수학여행 가는 버스처럼 버스가 급정거하거나 한쪽으로 급격히 쏠리면 아악~ 하는 비명 또한 요란했으니 운전사 아저씨가 운전할 때 꽤 피곤하셨을 것 같다. 툭하면 ‘동숙’이라는 이름의 아이를 ‘똥숙아!’ 라고 불러대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날마다 학교에서 학생으로서 감내한 억압과 정신적 긴장을 열렬하게 말로 털어놓음으로써 해소하는 공간인 학교 버스는 가히 사랑이 꽃피는 버스였다.
버스에서 일어난 일 중 가장 많이 나오는 이야기는 자리 양보와 관련된 것일 테다. 어떤 젊은 여자가 앉아있는데 좀 나이든 남자가 다가와 자리 양보 좀 하지, 할 때 저도 피곤해요, 하고 일어나지 않았다가 봉변을 당한 이야기를 아는 언니가 해주었다.
그 남자가 가는 내내 요새 젊은것들은 어른 대접을 할 줄 모른다느니, 이래서야 이 나라가 앞으로 어찌 되겠느냐느니, 귀가 따갑도록 핀잔 주기를 그치지 않자 참다못한 그 여자는 다음 정류장에서 내렸단다. 앉은 게 무슨 죈가. 학생도 피곤하고 젊어도 피곤하다고, 우리는 모두 젊은 여자 편을 들었다. 몇 시간을 서서 일하고 처음으로 앉아 쉬던 중이었는지도 모르지 않는가.
회유 형도 있다. 앉아있는 젊은이나 학생 앞으로 가서 큰소리로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자리 양보도 잘하고, 우리나라가 참 제대로 됐어, 하는 거다. 그 말에 그냥 앉아있을 젊은이가 있겠는가. 젊은이가 일어나면 목적을 달성한 덜 젊은 전략가는 여유 있는 미소를 띠며 고맙다, 하고 자리에 앉는다.
한 친구는 당연히 받아주리라 여기고 이것 좀, 하며 책가방을 내밀어 앉아있는 사람의 무릎에 거의 올려놓았는데 치우라고 해서 민망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책이 가득 든 책가방은 무릎 위에 놔도 무겁다. 그래서였을까? 아니면 옷이 구겨지거나 종일 교실 바닥에 뒹굴던 책가방으로 옷이 더럽혀지는 게 싫어서였을까? 나도 좀 들어줬으면 싶은데 앉은 사람이 끝끝내 들어주지 않은 적이 있다. 혹시 남의 가방을 만지고 달라고 하는 게 무례하다고 생각했을까? 설마.
앉아있는 사람이 서 있는 학생의 책가방을 들어주지 않는 색다른 이유를 하나 들었다. 신문 칼럼에서 읽었는데 가방이 무거워서나 옷이 구겨질까 봐서가 아니었다. 들어주면 ‘고마워요’ 하는 소리가 듣기 싫어 일부러 안 들어준다는 것이었다. ‘감사합니다’나 ‘고맙습니다’가 제대로 된 인사지 ‘고마워요’는 저희 동년배들끼리나 쓸 가벼운 말이라는 거였다. 당시에는 ‘뭘 그렇게까지!’ 했는데 이제 그 마음이 이해된다.
사람들이 요즘 부쩍 ‘감사해요’라는 말을 많이 쓴다. SNS에서 더 흔하게 쓰이지만 대면해서도 잘 쓴다. ‘감사합니다’는 너무 격식을 차린 말 같고 ‘고마워요’는 좀 가벼운 느낌인데 ‘감사해요’는 ‘감사’라는 단어가 있어 정중한 느낌을 주면서도 ‘요’라는 어미 때문에 너무 무겁지 않아 적당하다고 여기나 보다. 더 부드럽고 정겹다는 느낌도 드나 보다. 그런데 나는 이 말이 불편하다. 젊은 친구에게 들었을 때는 더 그렇다.
‘감사해요’가 처음 쓰일 무렵에는 다들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어법에 틀린 말 같은데 대화방에서 한번, 두 번 보고 쓰다 보니 익숙해지고 간편해서 일상생활에도 급속도로 전파된 것 같다. 말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어쩔 수 없는 것일까? ‘감사해요’는 완전히 잘못된 말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올해 ‘국립국어원’에서 한 답변에는 어법에 틀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격식을 갖추려면 ‘하십시오’체를 써서 ‘감사합니다’로 쓰기를 권한다고 적혀있다.
권위 있는 기관에서 내리는 판정과 여러 의견을 종합해 볼 때 ‘감사’에는 역시 ‘합니다’가 제격이다. 반말로 ‘고마워’라고 하는 사이에 ‘감사해’라고 하지 않듯이(더러 쓰는 사람도 봤지만) ‘고마워요’ 대신 감사해요,를 쓰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감사합니다’는 내가 당신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다는 뜻이지만 ‘감사해요’는 감사하라는 명령문이다. 나는 ‘감사해요’라는 말을 들으면 ‘뭘 감사하라는 거지?’ 하는 마음이 든다. 나더러 감사하라는 뜻이 아님을 맥락으로 알아도 그렇다. ‘~요’체를 쓰려면 ‘고마워요’라 하는 게 낫다.
‘감사합니다’가 극존칭이고 ‘고맙습니다’는 다음 가는 존칭도 아니다. ‘고맙습니다’는 순우리말로 ‘감사합니다’와 동급이다. 대통령이나 증조할아버지께 ‘고맙습니다’, 하는 건 전혀 결례가 아니다. 더 높이려는 마음으로 쓰는 ‘감사드립니다’도 어색한 표현이다. 감사라는 감정은 자신이 고맙게 느끼는 일인데 그걸 남에게 주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축하드립니다’도 마찬가지다. 강조하고 싶으면 앞에 ‘정말’이나 ‘진심으로’라는 수식어를 붙이면 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도 복을 많이 받으라고 명령하는 투라 좋지 않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뒤부터 나는 명령 대신 ‘복 많이 받으시길 (내가) 바란다’고 하려고 노력한다.
한때, 광고에 나온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크게 유행한 적이 있다. 이 역시 명령형이라 다른 사람에게 부자 돼라, 마라 하는 건 잘못이라는 국어학자의 견해를 들었다. 부자 되라는 게 나쁜 말이냐고 할 수 있지만 존칭 어미 ‘시’가 들어갔다고 명령이 아닌 건 아니다. 저 말에 당신이 뭔데,나 남이야 되든 말든, 했던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복권이나 하나 사주고 말하든가, 한 사람도. 명령조의 말이 기분 좋을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좋아하리라 지레짐작하고 대충 쓸 게 아니라 덕담도 잘해야 한다.
의사도, 약사도, 백화점이나 가게의 점원도 나에게 ‘감사해요’라고 말한다. 내가 그들에게 물건이나 의료 행위를 샀는데 왜 나더러 감사하라고 하나? 응대에 고마워서 내가 스스로 고맙다고 할 수는 있지만. 이러다가는 대통령이나 정치하는 사람에게도 ‘국민 여러분 감사해요’라는 말을 들을 것 같다.
‘고마워요’라는 말이 듣기 싫어 책가방을 들어주지 않았던 사람처럼 ‘감사해요’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면 감사받을 일을 하지 말아야 하나? 지적했다가는 감사하는 마음조차 갖지 않을까 봐 그냥 듣지만 참으로 고맙거든 ‘고맙습니다’나 ‘감사합니다’나 ‘고마워요’라고 했으면 좋겠다. 비슷한 연배나 나보다 어린 사람이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고마워요’라고 할 때 나는 절대 그들이 존댓말을 쓰지 않은 사람인 양 예의 없다고 생각하지 않겠다.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