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밤, 휴대 전화가 울린다.
“저, 이ㅇㅇ씨 와이픈데요.”
“네.”
모르는 사람이라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으니 발신자가 다시 말한다.
“이ㅇㅇ씨 와이프라고요.”
“네. 누구신데요?”
“...나 몰라요?”
“네. 누구세요?”
갑자기 상대가 언성을 높인다.
“모르긴 뭘 몰라요? 이ㅇㅇ씨 와이프라니까요. 이ㅇㅇ씨 알잖아요.”
그 뒤 몇 차례나 알잖아, 모른다고, 가 이어졌다. 전화 건 여자의 목소리는 점점 거칠어졌다. 나를 알면서 모르는 척 잡아떼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고 반말까지 했다. 아닌 밤중에 봉변도 유분수지, 듣다 듣다 나는 절대 모르는 사람이니 다시 전화하지 말라 하고 전화를 끊었다. 끊고 생각하니 왜 진작 안 끊었을까 싶다. 머릿속이 들끓어 잠이 안 왔다.
며칠 뒤 저녁에 또 전화가 왔다.
“이ㅇㅇ씨 와이픈데요.”
“네.”
“이ㅇㅇ씨 알죠?”
짜증이 확 치밀었다. 지난번에 그렇게 모른다고 했건만. 애써 감정을 누르고 한 번 더 모른다고 했더니 그 여자가 되레 성질을 내며 말했다.
“모르긴 뭘 몰라요? 옆에 있는데.”
기가 막혔다.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나 싶었다. 옆에 있나 와서 보라고 하니 거기가 어디냐고 했다. 대답하고 거기는 어디냐고 물었다. 우리 집에서 몇 시간 거리에 있는 곳이었다. 여자는 나를 마구 몰아붙였지만 죄 없는 나는 아니다, 모른다, 는 말만 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그게 이상했던지 아이들이 옆에 있다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무슨 일? 뻔한 일이다. 내가 남편의 불륜 상대라 믿어 나를 괴롭히고 혼을 내어 남편을 단념하게 하려는 것. TV에서 보면 남편이 바람났을 때 부인은 언제나 남편이 아닌 상대 여자를 찾아가 머리끄덩이를 잡고 살림을 때려 부수며 난동을 부린다. 내 남편에게서 썩 떨어지라고 호통치면서. 그게 항상 이상했다. 잡으려면 자기 남편을 잡아야지, 왜 그 여자에게 가서 난리인지. 언제나 여자가 가만있는 남자를 홀리는가? 가만있는 여자를 남자가 홀려 여자의 신세를 망치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데.
전화 건 여자도 남편이 아닌 상대 여자를 응징하려 했다. 남편을 미행해서라도 대면하여 끝장을 보지 못하고 겨우 전화번호 하나를 알아냈는데 그것도 잘못된 것이어서 애먼 사람을 괴롭히고 있으니 딱한 노릇이다. 하지만 수시로 괴롭힘을 당하는 나도 못 할 노릇이었다.
전화벨 소리만 나면 놀라고 무서웠다. 며칠에 한 번씩, 어떨 때는 이틀 연속으로 오는 전화를 마냥 시끄럽게 울리도록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오늘 잘 말하면 오해가 풀려 다시 안 오겠거니, 기대하며 받기도 했다. 그러나 대화는 늘 너 맞지, 아니다, 맞잖아, 로 공회전만 했다. 옆에 있던 중학생 아들이 제 엄마가 시달리는 게 안 됐던지 전화기를 가져가 ‘우리 엄마, 아주 나이 많아요’라 외치기도 했다. 젊고 예쁜 사람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라 생각했던지.
그 일에 대해 듣기만 했던 남편이 모처럼 일찍 온 날 밤에 또 전화가 왔다. 그 여자가 내 남편이 지금 네 옆에 있지 않으냐는 소리를 할 때 남편이 전화기를 뺏어 들고 지금 뭐 하는 거냐, 아니라는 데 왜 자꾸 이러는 거냐고 큰 소리로 말했다. 그 여자는 잠시 멈칫하는 것 같았지만 이내 자신을 이ㅇㅇ씨 와이프라고 소개한 다음 내가 자기 남편을 만나고 있다고 말했다.
남편이 더 큰소리로 당장 거기 같이 가서 보여줄까요, 했다. 그랬더니 그 여자, ‘한 번 오이소. 오시면 잘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했다. 이게 말인가, 된장인가? 더 말해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했던지 남편이 다시는 전화하지 마라, 한 번만 더 전화하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엄포를 놓으며 전화를 끊었다. 나에게는 앞으로 전화를 받지 말라고 했다.
그 뒤로는 한동안 잠잠했다. 내 남편의 존재를 알고 나니 내 말에 신뢰가 갔던가? 그런데 얼마 만에 또 전화가 왔다. 받지 말라는 남편의 말도 있고 이제는 더 시달리지 않겠다고 마음 먹어 받지 않았다. 며칠을 계속 받지 않으니 음성 메시지가 날아왔다. 전화 안 받는다고 욕이라도 했을까 봐 그냥 뒀다가 나중에 열어보니, 자꾸 아니라고 하고 아닌 것 같다, 그동안 미안했다, 는 말이 들어있었다. 마지막 말은 죄송해요, 였다. 이것이 오래전 일이지만 아직도 우리 집에서 회자하는 ‘이ㅇㅇ씨 와이프 사건’의 전말이다.
나는 그때 그 여자에게 시달린 것도 괴로웠지만 그 여자가 자신을 ‘이ㅇㅇ씨 와이프’라 하는 것이 무지 듣기 싫었다. 그 여자는 아무개의 ‘와이프’라는 걸 마치 자신이 정경부인이기나 한 듯이 말했다. ‘나 ㅇㅇ 나온 여자야’ 하는 사람처럼 누구의 ‘와이프’라 하면 갖출 걸 갖추었다는 자부심과 자존감이 생기는 걸까? 나는 그렇게 말하는 그 여자가 더 딱했다.
바람난 게 의심되는 남편을 매번 ‘~씨’라 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원수 같은 남편이라도 다른 사람은 함부로 말하지 말기를 바라는 것 같은 태도는 남편을 높여야 정경부인인 자기의 위치도 공고할 거라는 생각에서였을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그렇게 ‘와이프’라는 말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남녀를 불문하고 무척 많이 쓴다. 심지어 명리학을 가르치던 지긋한 선생님조차 한자투성이 속에서 한자 하나를 가리키며 ‘이게 와이프’, 라고 말했다.
나는 우리나라 사람이 막 쓰는 영어 단어 중 ‘와이프’를 1등으로 싫어한다. 나에게는 누군가가 우리 와이프가, 라든가 누구 와이프는, 이라 말하는 순간 그 사람과 얘기하기 싫어지는 병이 있다. 영어 문장 속에서 ‘his wife’나 ‘my wife’를 볼 때는 아무런 이상 반응이 없는데 오직 우리나라 사람이 아내를 ‘와이프’라 하기만 하면 즉시 알레르기가 돋으니 참 이상한 일이다. f 발음을 신경 쓰며 ‘와이f’라 해도, 푸짐한 몸매가 연상되게 ‘와이푸’라 해도 똑같다.
아내를 ‘와이프’라고 하는 사람에게는 나, 이 정도 영어는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어, 무식하게 아내를 마누라나 여편네라고 부르지 않아, 하는 마음이 엿보인다. 자신을 신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편견이 없는 열린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것 같다. ‘와이프’가 뭐 그리 대단한 말이라고.
‘와이프’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자동차 앞 유리를 닦는 ‘와이퍼’가 떠오른다.(‘한글’ 프로그램으로 글을 쓰는 지금 ‘와이프’ 밑에는 틀린 말이라고 빨간 줄이 쳐졌지만 ‘와이퍼’는 외래어가 되었으므로 빨간 줄이 없다.) 아내를 ‘와이프’라 하면 조리대를 행주로 훔치고 바닥을 걸레로 닦는 여자가 떠오른다. 그러면 괜히 아내란 종일 집안 여기저기를 닦는 사람이란 말이냐는 반감이 생긴다.
예전에는 다른 사람에게 아내를 소개할 때 제 안사람입니다, 나 저희 집사람입니다, 라고 말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남편은 밖에 나가 돈을 벌고 아내는 집안에서 아이를 돌보며 살림하는 경우가 많아서였을 것이다. 나도 그랬기에 남편이 나를 그렇게 소개할 때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결혼하기 전, 아내라는 말이 참 예쁘고 사랑스럽게 들렸다. 그런 아내가 되고 싶었다. 아내의 옛말은 ‘안해’란다. ‘아해(兒)’, ‘사나희(男)’, ‘갓나하ᆞㅣ(女)’에도 들어있는 ‘해’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어린이, 젊은이, 늙은이라고 할 때 들어있는 ‘이’와 같다. 전통 가옥에서 남자는 사랑채에 있었다. 안해는 안채에 있어 ‘안에 있는 사람’이었다. 사냥해서 먹고 살던 시대에도 남편은 바깥사람이었지만 요즘은 부부가 모두 밖에서 일하는 ‘바깥양반’일 수 있으니 부인을 안사람이나 아내라고 하는 건 적절치 않다는 의견이 있다.
마누라는 원래 ‘마노라’라는 순우리말로 높은 신분의 남녀 모두에게 쓰이던, ‘마마’와 동급인 극존칭이었다. 그런데 19세기 말에 신분 제도가 무너지면서 존대의 의미는 사라지고 늙은 부인이나 자신의 아내를 가리키는 말이 되고 어형도 ‘마누라’로 바뀌었다. 마누라의 상대어인 ‘영감’도 정삼품 이상의 높은 관원을 부르는 말이었는데 ‘나이든 남자’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
남편의 상대어로 ‘여편’이 객관적이라 고려해볼 만하다는 의견도 있다. 여편네로 불리고 싶은 여자는 없지만 ‘여편’은 수용할 수 있을지. ‘여편’을 지칭할 딱 맞는 말이 없다고 여겨 그리도 ‘와이프’를 많이 쓰는 걸까?
그럼 ‘와이프’라는 말은 적절한가? 영어의 ‘wife’는 실을 짜다는 의미의 ‘weave’에서 왔다고 한다. 가정을 짜는 사람이란다. 오늘날 실로 가족의 옷을 짜서 입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취미로 하는 사람 말고는 없을 테다. 요즘은 가정을 짜는 일도 ‘wife’ 혼자 하지 않고 부부가 합심해서 하며 그래야 민주적이라고 여긴다. 무엇보다 '와이프'는 외국어지 우리말이 아니다.
언어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마누라’가 지체 높은 여인에게 하는 말이었어도 현시대에 듣는 사람이 기분 나빠한다면 가려 써야 한다. 아내의 어원이 무엇이든 현재 아내라는 말은 부부 중 여자 쪽을 일컫는 말로 굳어져 있다. 부르기 좋고 듣기 좋은 이 말을 쓰지 않을 이유가 없다.
‘신토불이’라서 우리 농산물은 수입 농산물보다 훨씬 높은 가치를 지닌다. 중국산 김치나 고춧가루는 질색하면서, 수입 고기는 할 수 없을 때나 먹으면서 말은 왜 마구잡이로 외국산을 먹고 쓸까? 우리에겐 우리 땅에서 난 ‘아내’가 있다. 남의 아내를 높여 부르는 ‘부인’도 있다. ‘This is my wife’라거나 ‘His wife is very beautiful’로 시작해 영어로만 말해야 하는 연회장이 아니라면 아내를 ‘와이프’라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