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한때 노래방 끝 곡으로 다 같이 손잡고 불렀던 노사연의 <만남>이란 노래의 첫 부분이다. 국민가요라 불렸던 그 노래의 이어지는 가사는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다. ‘잊기엔 너무한 나의 운명이었’단다. 정말 절절한 운명이 느껴진다.
같은 가수가 부른 <바램>이란 제목의 노래도 있다. 뒷부분에 나오는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라는 가사에 많은 늙어가는 사람들이 위로를 받은 것 같다. 여기저기서 질릴 정도로 인용했다. 대부분 초로에 접어들었거나 더 나이 든 사람들이다. 젊은 사람들이 감동하는 모습은 별로 보지 못했다. 그들도 늙어가기는 하겠지만.
누군가는 우울하다는 말을 들으면 우울해진다고 했다. 나는 ‘늙’이라는 말을 들으면 늙은 사람이 된 것 같다. 늙어가는, 이라 해서 팍 늙어버린 기분이 들게 해놓고는 그게 아니고 실은 익어가는 거라니, 나는 가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젠가 한 친구가 또 우리는 늙어가는 것이 아니고 익어가는 거라고 하기에 너무 익으면 물러서 터진다고 하기도 했다. 나는 과일로 치면 익을 때가 지난 가을 과일인데 익어가다니 말도 안 된다. 좋게 말해야 단풍이고 그것도 곧 떨어질 단풍인데. 그런데 단풍이 져도 귤이 있다는 건 참 다행한 일이다.
노래의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 해도 이 두 노래에 나온 ‘바램’이라는 단어는 틀린 말이다. ‘바램’은 볕이나 습기로 색이 변하는 것이다. 원하다, 희망하다, 는 뜻으로 쓸 때는 ‘바람’이라고 해야 맞다. 무슨 영광을 바라고, 너한테 바라는 거 아무것도 없어, 처럼 맞게 쓸 때도 있지만 잘못 쓸 때가 많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래요, 꼭 합격하시길 바래요, 다 잘 되길 바래요,는 다 틀린 말이다.
어릴 때는 ‘남비’가 표준어였다. 국어 교과서에 남비로 나오니 집에서도 ‘남비’라고 하려고 신경 썼다. ‘상치’가 표준어라 상추쌈도 못 먹고 상치쌈을, ‘마싣게’ 먹지도 못하고 ‘마딛게’ 먹어야 했다.
1988년, 새 한글 맞춤법과 표준어 규정으로 ‘상추’가 표준어가 되었다. ‘맛있다’를 마딛따/마싣따, ‘멋있다’를 머딛따/머싣따, 라 발음하는 것도 둘 다 허용했다.
‘냄비’는 ‘l 모음 역행 동화’(뒤 음절의 ‘l’ 모음의 영향을 받아 앞 음절의 ‘ㅏ’, ‘ㅗ’ 등의 모음이 ‘ㅐ’, ‘l’ 등의 모음으로 바뀌는 음운 현상. ‘역행’이라 하는 이유는 먼저 태어난 형 ‘ㅏ’가 나중에 태어난 동생 ‘ㅣ’를 닮아서, 라고 선생님이 말씀하셨다)가 일어난 말로 이런 말은 표준어로 인정하지 않는데 현실 발음을 수용해 표준어가 되었다.
표준말이 바뀌고 나서 친구와 같이 밥을 먹으며 ‘이제 냄비에 국 끓이고 상추쌈 마싣게 먹어도 되지? 마싣게 먹자.’ 했던 게 생각난다. 상치를 씻어 상치쌈을 마딛게 먹느라 꽤 힘들었던 모양이다.
이때 ‘~읍니다’와 ‘~습니다’로 구별해 썼던 종결어미도 소리 나는 대로 ‘~습니다’ 하나로 통일했다. 그전까지는 받아쓰기 시험에서 ‘했습니다’, ‘없습니다’라 쓰면 가차 없이 틀렸다고 작대기가 그어졌다. ‘갔읍니다’ 대신 ‘갔습니다’라 쓰니 사는 게 한결 편해진 느낌이 들었다.
짜장면도 한때는 자장면이 표준어였다. 1986년, ‘국립국어원’에서는 중국어 표기 원칙에 따른다며 자장면을 표준어로 정했다. 하루아침에 짜장면은 틀린 말이니 자장면이라 부르라 하자 사람들의 반발이 컸다. 자장면이라 하니 왠지 맛없게 들린다, 어린 시절 특별한 날에 먹던 최고의 음식인데 이름이 바뀌니 추억마저 훼손되는 것 같다는 등 불만이 쏟아졌다.
학계에서도 현 규칙이 대중에게 불편을 준다는 주장을 여러 차례 제기하자 ‘짜장면 표준어 인정 안’이 국어심의위원회의 안건으로 올라갔다. 1년 반의 검토를 거쳐 2011년 8월 31일, 짜장면이 복수 표준어로 인정되었다. 사람들은 25년 동안 짜장면을 짜장면이라 부르지 못했던 슬픔도 끝이라며 8월 31일을 짜장면 광복절로 정해야 한다고 익살을 부렸다.
‘표준어의 실제 발음을 따르되 국어의 전통성과 합리성을 고려해 정함을 원칙으로 한다’ 한글 맞춤법과 표준어 규정의 대원칙이다. 여기에 따라 언젠가는 바램도 바람과 함께 복수 표준어가 될지 모른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다. 건강하시기 바래요, 네가 행복하기만 바래, 하면 어법에 맞지 않는 말을 한 것이다. 나는 법대로 하기 싫어, 내 법은 내가 정해, 라 한다면 할 수 없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자신의 법을 따라 살면 된다. 하고 싶은 대로 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 그것은 나의 바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