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아빠

by 가을산

오빠가 저번에 어쩌고저쩌고, 하면 추리해 봐야 한다. 오빠가 동기간을 말하는 건지 남자 친구나 남편을 말하는 건지. ‘오빠’는 원래 같은 부모에게서 났거나 친척 중 같은 항렬의 손위 남자를 부르는 말인데 형제가 적고 사촌 간의 유대도 끈끈하지 않은 요즘엔 남자 친구를 뜻하는 경우가 많다. 애인이 생기면 나도 ‘오빠’가 있다고 자랑한다. 그 오빠가 호적상의 오빠가 아님을 초면인 사람도 안다. 작은 두 다리를 버티고 서서 자신을 괴롭히는 남자아이에게 ‘나, 오빠 있어!’ 하는 다섯 살짜리 여자아이가 아니라면.


예전에는 사귀는 남자가 몇 살 많아도 오빠라고 하기보다 oo 씨, 라고 불렀다. 나처럼 형제가 많아 오빠도 한두 명 있는 사람은 우리 오빠도 아닌데 무슨 오빠냐며 절대 부르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부르던 자기 오빠에게는 그냥 오빠 소리가 나오지만 그렇지 않은 남자를 오빠라 부르기는 왠지 낯 간지러워서도 하지 않았다. 남자도 연상의 애인이나 아내라도 oo 씨, 라 했지 요즘처럼 ‘누나’라고 하지 않았다.


요즘은 결혼을 해도 남편을 오빠라고 부른다. 아이가 없어서인가 했는데 아이를 낳고도 그런다. 한 번 굳어진 호칭은 고치기가 쉽지 않은데 굳이 고치려고도 않는다.


아는 사람도 50대 중반인데 ‘오빠!’ 하고 떨어져 있는 남편을 불렀다. 그들은 아들이 손위인 남매를 두었다. 오빠도 오빠, 아빠도 오빠다. 이런 얄궂은 일이! 밥상머리나 여행지에서 서로 오빠를 불러댈 여자들을 상상하니 몹시 이상했다. 아들이 여자 친구를 사귀거나 결혼하면 그녀도 오빠라고 부를 테니 진짜 오빠는 한 명이고 여동생도 한 명인데 오빠라고 부르는 사람이 대체 몇 명인가? 그 사람의 남편은 오빠라 불리는 걸 싫어하지 않고 그렇게 부르는 걸 젊은 감각이라 여기는 것 같다.


본인들이 좋다면 뭐랄 건 없겠지만 사촌끼리 결혼하는 서양도 아닌데 왜 남편을 오빠라 부르나 하는 마음이 든다. 오빠와 결혼한 엄마라니, 어린 자식이라면 얼마나 헷갈리고 감당하기 어려운 일일까 하는 마음도.


남편이나 남자 친구를 오빠라고 부르는 까닭은 어린 시절, 먼저 태어나 뭐든 잘하고 자신을 잘 챙겨주던 오빠처럼 자신을 누이동생같이 귀엽게 여겨 잘 돌봐주고 문제 해결사가 되어주길 바라서는 아닐까?


그럴 때 남편의 마음은 어떨까? 사장으로 불리면 사장답게 행동하려 하듯 오빠로 불리는 남편은 ‘동생 잘 봐’ 하던 엄마의 말이 귀에 쟁쟁하여 ‘나는 오빠니까’ 하며 많은 걸 양보하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들지 않을까? 네댓 살 때도 그랬듯 그건 너무 무거운 책임이다. 부부는 대등한 위치에서 서로 돕고 의논하고 존중하는 관계다. 아내는 남편에게 항상 신경 써서 돌봐야 할 미숙한 여동생이 아니다.

한편, 오빠라고 불리는 남자는 갈등 상황에서 정말 동생에게 하듯 윽박지르거나, 말 안 듣는다고 어린 동생을 밀어버릴 때 썼고 지금은 더 커진 주먹을 쓸지도 모른다.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남자 친구나 남편을 오빠라 부르지 말아야 한다.


‘오빠’를 생각하다 보니 ‘아빠’라는 말도 떠오른다. 신혼 때 머리가 희끗희끗한 시숙이 시어머니를 ‘엄마!’라 부르는 게 무척 이상해 보였는데 지금은 아버지도 ‘아빠!’ 라 부르는 성인이 많다.


수명이 늘어서 유아기와 성장기를 길게 잡아도 되어서일까? 태어나서 부모의 품 안에 머무르는 시기가 길어졌다. 공자님도 나이 삼십에는 스스로 서야 한다고 하셨지만 이전에는 서른 즈음에(여자는 더 일찍) 독립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지금은 사십에도 부모와 동거하며 부모가 수발들게 하는 자식도 있다. 늦게까지 부모를 ‘엄마’, ‘아빠’라 부르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빠’는 아이가 처음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 ‘아버지’라는 발음이 잘 안 되어 임시로 쓰는 말이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어려워 ‘할비’, ‘할미’라 하는 것처럼.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게 귀엽다고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를 다 말할 수 있게 되어도 대부분 그냥 놔둔다. 그중 가장 오래가는 말이 ‘아빠’다.


아이의 언어 발달을 위해 유아어를 쓰지 말라는 건 현대 교육학에서 말하는 이론이나 유아기가 짧았던 시절에도 가정 교육을 중히 여긴 양반가에서는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면 바로 어머니, 아버지, 라 부르게 했다. 십 대에 결혼하여 일찍 어른이 된 자식들은 편지에도 자연스럽게 아버님, 어머님, 이라고 썼다. 나도 처음 집을 떠났을 때 편지 첫머리에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보십시오’라고 쓴 기억이 난다.

지금은 유아기뿐 아니라 십 대와 이십 대를 지나고 결혼을 해도 ‘아빠’라고 하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는 사람들. 홍길동이 아니라면 이유가 무엇일까?


민태원의 ‘청춘 예찬’은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명문이다. 그러나 지금 이 사회는 청춘 선망이 도를 넘었다. 동안 열풍이 거세게 불어 젊음을 지고의 선으로 여기는 듯하다. 나이보다 젊거나 어려 보이려고 몸부림을 치며 성형외과에서 ‘절차탁마’ 할 비용을 마련하느라 영혼까지 끌어댄다. 그렇게 해서 사십에도, 오십에도 이십 대처럼 보이는 외모가 만들어질 수도 있겠지만 거기에 맞추는지 마음조차 어린 상태를 유지하고 성숙하지 않으려 하는 건 더 문제다. 겉모습에만 치중할 뿐 내면의 성장에는 관심이 없어 나이는 들었으되 철이 없는 사람이 많다.


‘아버지’를 ‘아빠’라 부르는 것도 되도록 어른이 되지 않고 언제까지나 돌봄 받는 아이의 신분으로 남아 있고 싶은 마음에서는 아닐지. 이 사회는 자라지 않으려는 피터 팬으로 가득하다. 스무 살이 넘은 자식을 위해 부모는 수강 신청을 대신 해주고 입사 전략을 짜주며 면접장 복도까지 모시고 간다. 예전 같으면 부모가 되었을 나이의 자식을 어린 손주처럼 끼고 보호한다. 자식들의 어리광이 늘고 오래갈 수밖에 없다. 의학과 과학의 발달로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는 사람은 많으나 나이에 걸맞은 어른다움을 보이는 사람은 드물다. 사람들의 격이 전보다 낮아진 것 같다.


대상을 어떻게 부르느냐에 따라 행동도 달라진다. 성인이 되고 결혼까지 하고도 아버지를 ‘아빠!’ 라 부르니 아버지에게 어린애처럼 군다. 어린 날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돈을 내주던 부모에게 하듯 돈 내놓으라고 떼쓰다 안 되면 부모를 원수로 여기기도 한다. ‘아빠’라 부르고 반말을 하니 더 낮은 단계로 내려가기도 쉬워 부모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거칠게 말하고 불손하게 행동한다.

부모가 자식의 금고가 아니듯 성인의 아버지는 ‘아빠’가 아니다. 나이를 먹으면 남도 나에게 반말하지 않는 것처럼 어른이 되었으면 ‘아빠’를 ‘아버지’로 바꿔 부르고 존댓말을 써야 마땅하다.


장난감 가지고 같이 놀던 시기에 하던 대로 ‘아빠’라고 부른다 해서 젊은 아버지가 목말 태워주던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다. 남편을 오빠로 부르거나 아버지를 아빠라 부르며 어리광 피울 때는 지났다. 새는 날갯짓할 수 있으면 둥지를 떠난다. 사람도 세월을 먹으면 성숙해져야 한다. 아이의 부모로서 동반자인 남편의 여동생 되기, 나이 든 ‘아빠’의 어린 아들, 딸 되기를 끊자. 어정쩡하게 ‘오빠’ 자리에 있는 남편에게 제자리를 찾아주고 ‘아빠’라는 유아어 대신 ‘아버지’라는 말을 쓰며 주체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되면 어떨까? 나이 든 아이가 아니라 어른다운 어른이 많아져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품격이 올라가길 기대해 본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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