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실 Oct 24. 2024

우리가 함께 걷는 마지막 순례길

2024년 6월 23일 일요일, Porto


포르투의 휴일 오전을 홀로 보내고 해피호스텔로 돌아왔다. 에밀리가 창문 앞에 반쯤 누워 쉬고 있다. 에밀리에게 오전에 혼자 보낸 시간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전에 대성당 앞에서 떠올린 책구절도 번역기를 돌려 공유했다. 책구절을 보더니 에밀리 눈이 촉촉해진다.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 않았나 싶다. 줄 게 있다며 가지고 있던 스웨덴 책을 몇 장 찢어서 건넨다. 서로가 선물한 책구절 앞에서 훌쩍이다가 다시 또 깔깔 웃으며 이야기하다보니 어느덧 저녁.


개인 시간을 보내고 온 친구들이 로비에 모였다. 해피호스텔 이름에 걸맞게 행복이 느껴지는 유쾌한 친구들과 기타를 두드리며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축제의 장으로 나가 현지 음식을 먹으며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 같은 시간을 만끽했다. 술을 즐기지 않는 에밀리와 나는 다른 친구들보다 일찍 숙소에 들어왔다. 다가올 이별에 울컥하는 마음이 올라올 때쯤 밖에서 퍼-엉! 하는 소리가 들린다. 축제의 피날레, 불꽃이다. 둘 다 창문 밖으로 목을 빼고 터지는 불꽃들을 본다.




2024년 6월 24일 월요일, 내륙길 Vilarinho


처음으로 출발부터 알베르게 도착까지 계속 걷는다. 그전까지는 걷다가 잠깐씩 만나는 것 말고는 철저히 혼자 걷기를 좋아하던 우리인데, 참 신기하다. 같이 걸어도 마음이 편안한 사이가 되었다. 에밀리는 나중에 나를 '다른 세계에서서 온 자매'라고 표현했다. 동의하는 부분이다. 중간 중간 쉬면서 서로의 가족 이야기도 나누게 되었다. 일찍 어머니가 돌아가신 에밀리의 이야기, 일찍부터 혼자가 된 우리 엄마의 이야기. 다른 세계에서 온 자매라는 말에 걸맞게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서로 음악을 하나씩 추천해 주면서 걷고, 전철역에 있는 피아노로 영화 <아밀리에> OST를 연주하고, 서로 책과 영화 이야기를 하며 통하는 구석을 새롭게 발견하기도 했다. 각자가 추구하는 사랑, 역사와 지리, 언어 심지어 부동산 이야기까지!  언어와 역사에 강하고, 건강한 식재료로 직접 요리하는 에밀리 덕분에 나는 처음으로 영어를 뱉는 게 즐거워졌고, 우리가 걸은 포르투갈, 스페인과 스웨덴의 지리와 역사가 흥미로워졌으며 올리브를 사랑하게 되었다. 에밀리와 함께 한 시간들은 따로 책을 써도 될 만큼 길 위에서 정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저녁에는 고마운 마음을 담아 포르투에서 만난 한국인에게 공수해 온(?) 열라면 한 봉지를 끓여주었다. 하루종일 같이 있으면서 내일이 우리 둘이 함께 하는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




2024년 6월 25일 화요일, 해안길 Esposende


오늘은 우리가 함께 걷는 마지막 순례길. 우리의 목적지는 Esposende. 에밀리는 Esposende에 살고 있는 친구 부부집으로 간다. 그곳에서 3일 정도 쉴 계획이라고 한다. 나는 내일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비아나두 까스텔로라는 마을로 가기 위해 그곳으로 간다. 이유는 다르지만 둘다 필요에 의해 내륙에서 해안가로 빠졌다. 함께 걷는 마지막 날까지 예상치 못한 재밌는 일들이 생긴다. 우연히 포르투갈 현지인 할아버지 한스와 함께 셋이 점심을 먹었다. 술을 잘 못하는 우리 둘이지만 한스가 사주는 로컬 와인도 감사히 마셨다.


한스는 순례자인 우리와 함께 하는 시간이 진심으로 행복해보였다. 그렇지만 시간을 보니 벌써 2시간 30분 정도가 지나있었다. 더 지체하다가는 너무 늦어질 것 같아서 이제 그만 가면 좋겠다는 사인을 보냈다. 포르투갈어를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 시간이 점점 지루해지기도 하고, 마지막으로 걷는 날인데 우리의 시간이 줄어드는 것 같아 아쉽기도 했다. 한스와 헤어지고 에밀리가 말했다.


"한스의 친절에 감사를 표현하고 싶었고, 좀 더 예의바르게 행동하고 싶어서 그의 말을 끊을 수가 없었어. 내 마음보다 타인의 마음을 더 신경썼던 것 같아. '거절하는 법'에 대해서 교훈을 하나 배운다. 나도 20% 정도 밖에 못 알아들어서 힘들었는데, 세실 너는 더 힘들었지? 미안." 살짝 시무룩했던 마음이 풀린다. 가고 싶다고 내색하지 않은 내 잘못도 있는 걸 뭐. 길 위에서 계속 배우는 우리다.


다시 걷고 쉬기를 반복하다보니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했다. 마지막으로 이른 저녁을 먹고, 에밀리가 식당 앞에서 잠시 멈췄다. 배낭을 앞으로 메더니 손바닥만한 수첩을 보여준다. "순례길에서 직접 그린 그림이야. 갖고 싶은 그림을 골라봐. 선물하고 싶어." 에밀리가 그린 소중한 그림을 받았다. 에밀리와 마지막으로 포옹한 뒤 인사했다. "See you." 인사말처럼 진짜로 친구가 된 우리는 정말로 다시 만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만날 것을 알기에 조금만 아쉬워하기로 한다.



순례길은 예상 밖 일들의 연속이었고, 그중 하나는 에밀리를 만난 것이다. 리스본부터 포르투까지 가는 길에서 거의 유일한 젊은 여자 순례자였던 우리 둘. 비슷하고도 다른 우리. 피부색과 눈, 머리색과 덩치까지 완전 다른 겉모습을 가진 우리지만 비슷한 취향과 비슷한 경험, 그리고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며 닮은 사람임을 자주 느꼈다. 알게 모르게 많이 의지했고, 좋은 자극을 주고 받으며 때때로 서로에 의해 강해졌다.


나와 에밀리. 우리 앞에 남은 시간들이 기대된다. 에밀리도 잘할거고, 나도 잘 할 거라는 것을 안다. 우리는 보다 여유롭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걸어갈테지. 스스로 행복할 줄 아는 사람들이니까. 자기 자신을 스스로 구할 줄 아는 사람들이니까. 내일부터 다시 혼자다. 혼자서 남은 길을 걸을 준비가 되었다.





에밀리가 만든 책갈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