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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실 Aug 29. 2024

사랑하는 이름들을 배낭에 달고

순례길 신부 입장 ep.08

연달아 날씨가 맑다. 덕분에 새로 산 판초우의는 배낭 앞 아래쪽 주머니에서 잘 쉬고 있다. 6월 포르투갈의 날씨는 이른 새벽과 저녁에는 기분 좋게 시원하고, 오전 10시부터 한낮까지는 볕이 아주 강하다. 깜빡하고 팔에 선크림을 바르지 않고 팔토시 없이 반팔을 입은 날 알았다. 찬물 샤워를 하고 나와도 피부가 따끔거렸다. 반팔 선을 기준으로 살색도 확연히 달라졌다. 아차 했던 이 날을 기점으로 얇은 긴팔 기능성 옷을 매일 빨아 입고, 얼굴부터 목까지 선크림도 꼼꼼하게 바르는 중이다.



전날 손빨래한 양말이 덜 말라서 가방 어깨끈 오른쪽과 왼쪽에 옷핀으로 달고 걷는다. 날 좋은 김에 스포츠타월도 한번 더 빨아서 가방 뒷부분에 옷핀으로 달았다. 뜻밖의 배꾸(배낭 꾸미기)다. 이렇게 빨아놓은 빨래를 배낭에 달고 걸으면 살림왕(?)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좋은 기분으로 걷는다. 걸을 때마다 나는 흙바닥 소리를 듣고, 숲길 사이로 핀 소라색 수국을 감상한다. 그리고 좁은 골목길에서 마주친 말과 소를 쳐다보며 문득 순례길을 걷고 있는 지금이 매우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을 한다. 내가 순례자라니!



혼자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 두 사람이 보인다. 얼굴이 까만 남자가 손을 흔들며 나를 부른다. "세실!" 쿡이다. 쿡 옆에서 나를 보며 웃고 있는 중년의 여자분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세실, 한국 분이시래!" "우와, 여자 한국 순례자 처음 봤어요." 사람 좋은 얼굴로 깔깔깔 웃으시는 분의 이름은 도보여행가 도경님. 프랑스길 800km를 다 걷고, 산티아고 대성당에서부터 포르투갈길을 역으로 걷는 중이라고 하셨다. 포르투갈길까지 모두 걸으면 무려 1,450km 정도 된다. 그런데 힘든 내색이 없다. 행복만 먹고 산 사람처럼 고우시다. 하얀 기능성 긴 팔에 멋스럽게 통이 살아있는 바지, 살이 타지 않게 손끝만 뚫려있는 장갑, 목에 두른 귀여운 연두빛 손수건. 그리고 희한한 배낭을 메고 계셨다.


도경님의 배낭을 보느라 쿡이 그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들리지 않았다. 가방에는 한글로 쓴 이름이 가득했다. 멋스럽기도 기괴하기도 한 이름들에 대해서 여쭤보았다. 본인의 순례길을 응원하는 친구들의 이름을 써서 배낭에 달고 다닌다고 하셨다. 사랑하는 이름들을 배낭에 달고 걷는 마음이라. 그녀의 우정의 일부를 보고 있자니 한국에 있는 이름들이 떠올랐다. 무조건적으로 나를 사랑해주는 이름들.



아름다운 길을 걸으면서 떠올릴 수 있는 이름이 있다는 사실은 무척 감사한 일이다. 이 길을 걸으며 우정이 얼마나 힘이 센지 다시 실감하고 있다. 하루가 끝나면 일기를 쓰고 나서 혹은 쓰기 전에 사진과 영상 몇 개를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렸다. 잠을 자고 일어나면 한국에서 시 같은 DM이 와있다. 깨끗한 말들을 모닝커피 대신 마시면 입꼬리 올리며 기상할 수 있다.



- 난 피드 보며 감정이입이 되어서 같이 행복하고 건강해진 기분에 취해. 넘넘 기뻐하는 게 만면에 드러나서 같이 행복해져. 행복 만끽하며 넓은 세상 속으로 풍덩 빠지고 와. 여긴 밤 12시가 넘은 시각이야ㅎㅎ 자기 전에 세실 피드 한번 더 확인하는 행복! (친한 지인 J의 DM)


- 예전부터 세실님 피드 잘 보고 응원하고 있는 팔로워입니다. 보물을 발견하셨나요? 매번 눈팅만 하다 오늘은 용기내서 응원드리고 싶어 이렇게 메세지 보내봅니다. 남은 길 여러 곳에서 보물을 발견하시길 바래보며. 무탈하고 행복하게 앞으로의 일정 잘 마무리하시길 응원해봅니다. (어느 인친님의 DM)



아주 잠깐이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배낭에 달고 걷는 도연님을 만나고 중년이 된 우리의 우정을 상상했다. 지금도 좋고 그때도 좋을 우리의 우정을 가꾸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받은 마음에 대해 감사하는 것. 그것이 전부 아닐까? 비현실적으로 행복한 길이면서 덕분에 걷는 길이다. 고마운 이름들을 중얼거리며 걸어본다. 친구들과 함께 걷는 마음으로.



*DM의 주인공들이 브런치 구독 중이라 쑥스럽지만 다시한번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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