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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실 Aug 27. 2024

순례길이 조금씩 익숙해지는 이유

순례길 신부 입장 ep.7

자고 있는 순례자들이 깨지 않게 가방을 복도로 가지고 나와 나갈 채비를 했다. 공용 주방이 닫혀있어서 알베르게 문 앞에 앉아서 바나나로 아침 식사를 때우고 있었다. 바나나를 다 먹어갈 때쯤 쿡과 마티아스가 순서대로 나온다. 약속한 것은 아니지만 생활 루틴이 비슷한 우리는 오늘도 알베르게에서 가장 먼저 출발했다. 자주 아침을 함께 먹고 출발하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한번씩 마티아스가 30분 정도 일찍 출발할 때도 있다. 그래도 길 위에서 금방 만난다. 



걷다보면 저 앞에서 느긋하게 여름 휴가를 즐기는 산타클로스처럼 자연을 음미하며 사진을 찍고 있다. 멀리서 보아도 마티아스다. “마티아스!” 하고 부르면 씨익 웃으며 자기가 찍고 있는 피사체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아름다운 풍경들 앞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크게 감탄하다가 또 각자의 속도로 걷기 시작한다. 그럼 어느새 혼자 걷고 있는데, 앞 뒤로 친구들이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안정감이 든다. 풀 속에서 움직이는 작은 도마뱀의 부스럭소리도 어느 순간 두렵지가 않다. (세실 많이 컸다.)



두려움이 줄어드는 것과 달리 타고난 길치력은 여전했다. 익숙하지 않은 곳은 지도가 있어도 헤맨다. 순례길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하루 중 한 번은 길을 잘못들어 30분 이상 더 걸었다. 괜히 억울해지는 순간이다. 길치가 사람 없는 유럽의 이름 모를 시골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 생각해도 웃기다. 몸은 고단하지만 웃긴 에피소드가 매일 있으니 이것도 순례길의 수확일까. 한번은 갈림길 앞에서 고민하다가 우측길로 꺾으려고 하니, 언제 왔는지 뒤에 와있는 마티아스 목소리가 들렸다. “세실~?” 눈과 입으로 왼쪽을 가리키며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인자한 표정을 짓는다.


아, 이런 적도 있다. 그날은 길을 몰라서 헤맨 게 아니었다. 몸이 더 편할 수 있는 꼼수를 부리느라 까미노 표식 앞에서 고민 중이었다. 지도를 보니 왼쪽길이 순례길 루트였는데 구글맵과 비교해보니 오른쪽 길이 알베르게 숙소까지 더 가까워보였다. 그래봤자 30분 정도 차이였지만 말이다. 


‘오늘도 꼴찌로 알베르게에 도착할 것 같아. 좀 짧아보이는 길로 한번 가볼까?’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세실~?”


마티아스다. 얼굴이 뜨거워졌다. 얄팍한 속마음이 들킬까봐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고 “오, 땡큐!”라고 얼버무렸다. 그렇게 늘 바른 길을 알려주는 까미노 친구 마티아스와 함께 좌측 길을 걸었다. 혼자 걸을 때 지루했던 길이 마티아스와 함께 걸으니 즐거웠다. 어떨 때는 혼자 걸어 좋으면서도 이렇게 같이 걸을 때 더 좋은 경우도 있다. 똑같은 거리를 걸어도 이렇게 달라지는 기분과 감정을 관찰하는 것도 흥미롭다. 마티아스는 마음 급해보이는 나에게 먼저 앞장서라는 손짓과 함께 이렇게 말했다.


“Don’t hurry.”


"Don't hurry, Be happy." 쿡과 마티아스가 내게 자주 해준 말이다. 알면서도 자꾸 잊게 된다. 그렇게 짧은 대화를 마치고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뒤를 보니 마티아스가 새끼 손톱보다 작게 보인다. 크게 손을 흔들며 인사한다. 아주 아주 천천히 걸었다. 알베르게로 도착하는 길을 혼자 마무리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것 같았다. 마지막 2km는 내 속도에 맞춰 여유롭게 걸었다. 천천히 걷고 있자니 마음에 감사가 흐른다. 30km 이상을 며칠동안 연달아 걸으며 지쳤지만 끝까지 바른 방향으로 안전하게 걸었고, 비 소식이 있었지만 비가 오지 않았다. 담벼락의 아름다운 능소화를 보았고, 커다란 소들이 낮잠 자고 있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서두르지 않아서 만날 수 있었던 것들.


알베르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공용 거실 소파에 앉아 손을 흔들고 있는 쿡 아저씨가 보인다. 발 빠른 쿡은 이미 샤워와 빨래까지 다했다며 브이를 한다. “자고로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냉장고로 달려가야해. 전날 머물렀던 순례자들이 짐도 줄일 겸 맛있는 걸 두고 갈 때가 있거든. 일회용 수저 같은 것도 남아있으면 미리 미리 챙겨둬 세실. 그거 나중에 되게 유용하다.” 오늘도 재미난 순례길 꿀팁을 전수한 쿡은 이어서 근처 식료품점 위치와 마감 시간을 알려주고, 빨래는 어디에 말리면 좋은지도 알려준다. 



첫 알베르게에 도착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기분이다. 조금씩 순례자 생활에 익숙해지고 있다. 친구가 생긴다는 것은 삶에 적응하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혼자서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까미노 친구들 덕분에 두려움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알고 있던 것도 새롭게 깨닫고, 몰랐던 삶의 지혜도 배워가는 시간들. 언젠가 두 사람과 속도가 달라져서 헤어지게 되더라도 받은 마음 잊지 않도록 두 사람의 이름을 일기장에 옮겨본다.


알베르게 앞에서 출발 전 / 한국에서 준비한 사진 엽서를 들고 있는 마티아스, 쿡, 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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