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리, 상점들 사이에서 보이는 낙서들을 단지 그냥 지나치는가?
장 미쉘 바스키아, 인터뷰
당신은 어디에 살고 있나요? 서울에 살고 있다면, 종로구지역을 지나가 본적이 있을 것이다. 높은 건축물 사이에는 도시의 상점들이 있다. 이곳에 위치한 상점은 도시의 옛터를 상징하는 흔적이자 기억으로 한국의 오랜 역사를 함께한 역사적 장소이다. 그리고 거리의 상점 문이 닫힌 곳 혹은 갈라진 벽 틈 사이에는 낙서를 발견 할 수 있다. 빨강, 노랑, 녹색 등 갖가지의 원색의 스프레이로 글씨를 휘갈겨 쓰거나, 그것을 표현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언어, 메시지가 남겨져 있다. 사실상 자세히 들여다봐야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의미도 있지 않은. 상점들 사이에 보인다. 왜 종이가 아닌 벽 위에 스프레이로 표현을 하려고 한 것일까?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 잠시 메모를 하기 위한 공간이 이제는 디지털공간 속에서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이전에는, 도시의 벽은 누군가의 외침이자 고발 그리고 사회에 대한 저항, 표현을 갈구하는 캔버스로 어떤 공간보다도 통제와 제약이 없는 장소였다. 장 미쉘 바스키아(Jean Michael Basquiat, 1960~1988)에게도 도시의 벽과 상점은 자유와 해방을 갈망하는 그에게 더 없는 메모장이자 표현의 장이였다.
바스키아. 이렇게 우리 앞에 등장했다. 때로는 진지하게 턱을 괴고 생각을 하는 바스키아, 그의 모습 속에 함께 담겨진 그의 예술에 대한 진지함은 냉소적인 메시지를 담아내면서도 유머러스하기에 더욱 친숙하다. 바스키아. 그의 낙서는 자신의 인생이었다. 세상에 대한, 바로 자신이 살고 있는 미국의 부조리한 현실을 꼬집는 그야말로, 거침없는 자기고발적인 표현으로 앤디 워홀을 놀라게 하고, 미술계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당신들이 말하는 그 지독한 예술, 엘리트적 허례의식으로 도도한 척 하는 그 예술. 그것만이 예술이 아니다. 예술은 자유를 통제할 수 없다.” 바로. 바스키아는 제약과 통제로 규범화된 미국미술계의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당신들만의 예술은 예술이 아닌, 상당히 파격적인 대화를 그들에게 시도한다.
세이모(SAMO), 흔해 빠지고 낡은 것, 그것이 바로 바스키아다. 1976년경, 바스키아의 친구 알 디아즈(Al Diaz)와 함께 한 세이모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것은 그가 한 서명이라는 사실. 그리고 이 활동을 통해서 뉴욕 맨해튼의 거리와 지하철에 낙서작업으로 도시 곳곳에 유머러스하면서도 정치와 소비주의. 사회에 비판적인 메시지를 표출하고 다녔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싶은 마음이 컸던 바스키아는 알 디아즈와의 활동을 중단하고, 1979년 세이모도 함께 사라졌다는 “SAMO© is dead”, 사실을 또 한 번 낙서를 통해서 알렸다.
바스키아 특유의 표현은 그 당시까지만 해도 없었던 새로운 도전이었다. 1980년 바스키아는 언더그라운드 작가 그룹전시《더 타임스퀘어쇼 The Times Square Show》(1980)를 통해 미술계에 도전장을 내민다. 미니멀리즘이라는 도도하고도 까칠한 예술에 소위, 개념을 중시하는 철학과 사상들이 속속들이 등장하면서, 추상표현주의의 독보적인 위치가 지속될 수 있는 지적예술의 탄생기였다. 사실상 1970~80년대 미술계는 엘리트지식을 자랑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여 질 수 있는 현실이었다. 그 사이에서 앤디 워홀과 팝아트의 등장은 소비문화기호에 대한 상식 밖의 예술이 터져 나온. 그야말로 새로움이였다.
과연 무엇이 예술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으며, 바스키아도 이를 무척 고민했을 것이다. 자신은 어떤 예술로 나를 표현할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이 바스키아의 머릿속에 가득 찼다. 바스키아의 <자화상 Self Portrait>(1984)속에서 그의 생각과 철학들을 모두 담아내려고 표현하려다 보니 그의 초상은 어딘가 억눌렀던 감정을 표출해내는 분화구와 다른 게 없었다. 그 중에서도 <해골 Skull>(1981)은 바스키아의 대표작품이다. 인간을 해부학적으로 파편화시킨 바스키아. 캔버스 위에 그려진 인물의 머릿속은 온통 휘갈겨 낙서되어 있다. 정확한 얼굴의 대칭보다는 무언가 파괴적이고 불안한 모습. 때로는 배경과 뒤얽혀 기괴하고 정형화된 구성을 탈피한다. 어딘가 손상되어 있고 상처가 꿰매져 있다. 불편하면서도 불안전하고 뭔가에 찢겨진 듯한 해골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미지가 아니다.
바스키아의 화폭은 어떤 캔버스보다도 넓었다. 자신만의 언어, 그리고 세상에 대한 자기고발적인 메시지를 담기 위한 그의 철학은 <할리우드 아프리카 Hollywood Africans>(1983)에서도 주목된다. 자화상. 손을 발이라고 표현하는, 유머러스한 표현. 지웠다 다시 작성한 문구들이 함께 보여 지면서, 할리우드로 상기되는 자신의 생각들, 영화의 스타들, 영웅 등 파편적인 단어들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단지 바스키아는 몇 번의 붓질로 이 모든 것을 표현한다. 이를 제작하는 순간에도 우리는 볼 수 없지만. 몇 번을 지웠다, 색칠했다하는 무한반복의 바스키아의 고뇌와 그의 모습이 중복된다.
바스키아에 대해서 한국에서는 최근에 《거리, 영웅, 예술》(2021)을 통해서 우리에게 소개되었다. 이번 한국에 온 바스키아의 작품들 중에서도 눈에 띈 그의 낙서와 특히, 캔버스의 화폭을 넘어서는 거대한 낙서들이 전시장에 가득 채워졌다. 또한 바스키아적인 음악을 상기시키는 BGM이 전시공간에 울려 퍼지며, 한 층 더 그에게 몰입할 수 있게 한다.
1981년 제작된 <무제 Untitled>(1981)에서 바스키아는 세이모를 통해서 벽에 낙서한 자국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바스키아 특유의 기호들이 캔버스에 담겨진 것이다. 바스키아의 기호는 동굴벽화속의 문자, 기호와 같이 상징적인 의미를 드러내는 암호와 같다. 그 사이에 <오래된 자동차 Old Cars>(1981)과 같이, 바스키아의 절제되지 않은 드로잉, 텍스트, 콜라주는 어린아이의 순수함이 묻어난다. 흔히 아이들의 낙서에서나 볼 수 있는 표현, 어떤 형태를 그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이 생각한 것을 그려내고자 한 잠재된 무의식이 표출된다.
<오엑스의 턱의 측면 Side View of an Oxen's Jaw>(1982)도 그 한 예가 된다. 이미 무언가 그려져 있는 캔버스 표면에 흰색으로 색을 칠했다. 그리고 흰색을 색칠하기 전에 무엇이 그려져 있었는지는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 위에 작품 제목이 살짝 얼비쳐 있고, 무언가를 구상하는데 필요한 드로잉의 선이 보인다. 그리고 ‘이(teeth)’로 보이는 이빨이 하단에 텍스트와 함께 표현되어 있다. 캔버스에 흐르는 미묘한 생동감은 바스키아가 당장이라도 낙서를 하고 지나간 듯, 그의 음성이 들린다. 때로는 <특별한 담배 Extra Cigarette>(1982)에서와 같이 아이들이 그린 왕관인지, 자동차인지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유분방한 그의 붓질은 캔버스뿐만 아니라 체인이 걸려있는 나무판 위에 그려냈다.
최근에는 바스키아의 <전사 Warrior>(1982)가 최고가의 경매로 낙찰되면서 그의 작품이 더 이상 낙서가 아닌, 예술이 되었다. 1980년대 뉴욕미술계의 신화적 아웃사이더로 말할 수 없는. 아웃사이더이기에 더욱 빛이 났을 수 있는 그의 평범하지 않은 표현과 그만의 개성이 우리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때로는 음악적인 리듬감으로 우리의 마음을 요동치게 한다. 채널9(Channel 9) 밴드활동을 하면서, 재즈, 펑크, 신스팝 등에 심취하여 음악인으로 활동했던 지난날의 바스키아의 음악은 그의 낙서와 함께 오묘한 조합을 보여준다. 바스키아는 또한 랩 음악 제작에 참여와 함께 역동적인 리듬감이 그의 낙서와 캔버스의 붓질에도 표출한다. 1982년 진행한 <베이비 붐 Baby Boom>(1982)은 세 개의 화폭으로 나뉘어 춤을 추듯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인물들이 발가벗겨져. 위아래로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파편적이고 흩어져 있는 선, 색, 그리고 형태의 조합은 비대칭적이면서도, 현란해 보일 수 있는 붓질이 절묘하게 어울러진다.
실제 바스키아의 작품과 함께 그의 음악적 대중성은 1997년 갤러리현대에서 천재낙서화가, 뉴페인팅이라는 소식으로 알려졌다. 《바스키아 전》(1997)전시가 알려졌을 때, 당시 바스키아와 콘서트로 언더그라운드밴드의 공연도 함께 진행됐다. 생각해보면, 미술과 음악의 조합과 구성, 또 하나의 퍼포먼스가 바스키아의 전시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았을까? 특히, 지금까지도 바스키아에 대한 애정은 앤디 워홀과 함께 했기에 더욱 주목될 수밖에 없었다.
누구보다도 자의식이 강했던 바스키아의 영웅주의적 태도는 스스로를 나약한 흑인의 모습으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사회가 흑인을 바라보는 편견, 당시 바스키아의 시대에 더욱 가혹했던 인종차별로부터 그는 자신을 가두지 않았던 것이다. 백인우월주의로 가득한. 특히. 뉴욕에서의 바스키아는 어떤 상황에도 마주한 그의 위풍당당함이 눈에 띈다. 그들보다 더 유명하고 스타될 수 있다는 확신에 찬 그의 목소리. 생각해보면. 앤디 워홀도 친구로 만든 그였다. 어떤 스타보다도 유명하였던 워홀에게 엽서 한 장을 들고 다가온 바스키아. 그에게 자신을 알리는 광고전략은 통하고 만 것이다. 바스키아의 낙서에 호기심을 가졌던 워홀. 그의 눈썰미는 분명 누구보다도 감각적이었을 지 모른다. 단번에 바스키아의 스타성과 재능을 알아차린 것이다.
바스키아는 <도스카베자스 Dos Cabezas>(1982)로 앤디 워홀과 자신을 그려냈다. 특유의 그들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듯 꾸밈없는 바스키아의 붓질이 거침없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앤디 워홀과의 첫 만남 이후로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이 작품 속에서 워홀의 눈은 무언가 당황하고 있는 듯하지만. 바스키아의 눈에서 본 그의 모습은 그에 대한 호기심이 느껴진다.
특히 워홀과의 바스키아의 공동작업 또한 눈에 띈다. 그들의 인연은 협업을 통해서 시작됐다. 1984년 워홀의 로프트에서 그의 실크스크린 작업을 캔버스에 진행하고, 바스키아는 즉흥적으로 텍스트를 붓으로 써내려가거나 표면을 색칠한다. 실크스크린과 회화적인 표현의 만남은 결과적은 독특한. 그 이상의 의미를 전해준다. 그들의 공동작업은 주로 <파라마운트 Paramount>(1984~1985)와 같은 유사한 방식과 과정으로 진행됐다. 먼저. 워홀이 신문헤드라인, 로고, 그리고 그 위에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담아낸 바스키아의 표현, 유명인, 정치인 인물의 머릿속에는 숫자와 자본주의 특유의 미소를 그려낸다. 사회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과 함께 유머러스하게 풀어내는 감각이 어울러졌다. <제 3의 눈 Third Eye>(1987)도 하단 아래에 보이는 상품가격과 해골의 몸속을 해부학적으로 파헤쳐놓은 듯하다. 소비상품과 자본이라는 그 키워드가 상기되는 앤디 워홀과 바스키아의 협업 속에서 보여 지는 것, 그들은 사업파트너였다. 예술은 고상한 것이 아닌, 우리의 일상 속에 녹아든 사회의 실제 모습을 표현했다. 예술이라는 이름을 매개로 자신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함께 해 나가면서, 이를 하나의 예술상품으로 만들어 버린 그들의 사업수완은 성공적이었다.
바스키아가 워홀을 만나 자신의 낙서도 예술이 될 수 있고, 상품으로 성공시키는 과정속에는 분명, 엘리트적이고 고상한 미술에 대한 반기와 권위의식에 따른 미술인들의 제도에 대한 불만과 요구사항과 마주했기에 일어난 하나의 시도였다. 독특한 표현과 캔버스로 생각한 도시의 벽과 지하철로부터. 바스키아는 타인과의 소통과 공생에 있어서 언어의 중요성을 남다르게 생각하였다. 바스키아의 낙서는 스스로 자신을 특별하게 만들어낸다. 도시의 오래된 흔적으로 보이는 낙서. 그 안에는 분명 누군가의 목소리, 표현이 담겨져 있다. 때로는 바스키아와 같이, 때로는 익명의 누군가의 흔적으로 남겨져 있다.
디지털공간 속에 오래 머물고 있는 우리. 무엇을 생각하고, 함께 표현하고 있는가? 바스키아처럼 때로는 자신의 표현에 솔직함을 드러내는 것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