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워치만 사 주면, 러닝한다니까?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by 도토리

요즘 대한민국은 러닝 광풍에 휩싸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은 수변 앞 '캐널파크'라는 이름이 붙은 아파트에 살고 있어서인지, 매일 오조오억 명의 러닝피플을 보게 된다. 그들을 존경하고 동경하는 마음을 담아,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물건을 주문했다.


무려 워치.


요즘은 워치가 워낙 흔한 제품이지만, 전업주부인 나에게는 영 필요 없어 보이는 물건이었다. 매일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끔 운동을 하는 건 더더욱 아니고) 업무용으로 급한 전화를 받을 일이 1도 없으며, 아직 아이도 휴대폰이 없어서 아이의 전화를 놓칠까 노심초사하여 손목에 진동을 울리게 할 일은 더더욱 없다는 거다.

그런데 사람의 심리란 어떠한가.


내가 워치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그 워치는 내 마음으로 들어와 하나의 꽃이 되는 것이다.


2주일 정도, 폭풍 검색을 하고 적당한 제품과 가격을 찾아내 쇼핑몰이 세일하는 그 순간을 틈타, 전략적이고 합리적인 가격으로 결제를 하고야 말았다. 이 얼마나 현명한 소비인지!

누구나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내가 저 물건만 가지면, 꿈꾸던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워치를 따악 차고 수변을 뛰는 누가 봐도 멋진 나,

급한 전화는 워치로 받으며, 러닝 중간중간 손목을 들어올려 쿨하게 페이스를 확인하는 건강하고 섹시한 나,

갑자기 떠오르는 나의 멋지고 번뜩이는 아이디어나, 아이의 사랑스러운 말들을 녹음하고,

러닝을 하며 듣고 있는 노래도 폼 안 나게 주머니 속 휴대폰 꺼내고, 지문 인증하고, 음악 어플 켜고, 다음 곡 재생을 누르지 않고, 굉장히 스피디하고 바쁜 현대인의 향기를 폴폴 풍기며 워치로 단박에 음악을 바꿔 재생하는 나,

체지방과 근력을 매일 체크하여 다이어트에 성공하고 활동적으로 건강을 관리하는 나.


'하...너무 멋진데.....?'


그런 상상.


그런데 그 상상은 현실이 되지 않았다.




나는 이 세상에서 누워있는 걸 제일 좋아하는, 밥 먹고 움직이는 시간을 제외하고 집에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누워서 보내는 INPF였던 것이다.


러닝을 한 열번은 했나. 야외에서 해 보니, 저질스러운 체력으로 감히 밖에 나가서 뛰려고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매우 불경스러운 생각이었다.

나의 뇌는 푸릇푸릇한 박카스 광고를 닮은 청춘미 가득한 모습을 주문했으나, 비루한 몸뚱이와 제대로 협상이 되지 않았다.

포카리스웨트 광고를 찍을 줄 알았는데, 신신파스 광고를 찍고 있었다.

족저근막염부터 시작된 정형외과 투어가 끝나질 않았다.


'네가 감히 러닝을? 돌았느냐?'


나 스스로를 이기기에는, 다른 나 자신이 생각보다 너무나 강했다. (어쨌든 이긴 것도 나 자신이니 그걸로 위안을 삼아야 하나?)


결국 중간에 멈춰서 걸을 수 없도록, 강제로 속도를 일정하게 만들 수밖에 없는 러닝머신을 이용하기 시작했고, 당연히 너무나 재미가 없었다. 러닝머신이 영국에서 죄수들을 고문하기 위한 도구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인 진실이었다.


헬스장은 정말 역설적인 장소이다. 세상에서 제일 신나고 파이팅 넘치는 노래가 나오는데, 왜 그렇게 지루하고 억겁의 시간이 흐르는 공간처럼 느껴지는지.


헬스장에 가지 않는 날들이 많아졌고,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매달 아파트 커뮤니티 헬스장에 만원씩 기부를 하기로. 나 같은 선량한 기부자가 또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한편으로 또 막상 워치를 차 보니 전화 올 데가 잘 없었다. 하루 종일 오는 전화라고는 보이스 피싱, 광고, 여론조사, 간간히 남편과 동네 엄마들 뿐이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워치의 배터리도 빨리 닳았다. 딱히 뭘 안 하고 하루 종일 손목에 올려만 놓고 다니는데도 저녁 시간이 되면 배터리가 다 닳고 없었다. 처음에는 불량인가 싶었는데, 찾아보니 원래 이 회사 제품이 그렇단다. 왠지 사기당한 기분도 들었다. 아이한테 사 준 중국산 워치는 며칠 동안 차고 다녀도 배터리가 그대로인데, 왜 7배나 비싼 내 워치의 배터리는 나처럼 쉽게 배고파하는가. 워치도 주인 닮았나 싶었다.


누가 사라고 총 들고 협박한 것도 아닌데, 혼자 몸이 닳아 사고 싶어서 사놓고 괜히 억울했다.


수면을 기록하는 기능이 제일 재밌고 유용한데, 밤 시간이 되기 전에 충전을 다 해놔야 하기 때문에, 저녁시간에는 충전기에 올려 두어야 했다. 정작 지인들에게 전화가 많이 오는 시간에 워치는 충전기 위에서 잠자고 있는 셈이다.


사람의 심리가 참 오묘한 것이, 그렇게 가지고 싶어서 안달이 났던 물건도 막상 내 손에 들어오면 금방 싫증이 나 버린다. 물건도, 사람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남편들도 그러지 않는가. 결혼 전에는 그렇게 사랑한다고,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 준다고 큰소리 뻥뻥 치더니, 고무장갑 하나를 안 사다 주는 세상 무심한 하숙생이 되어 버린다. 간간히 남편이라는 이름으로 애정표현이 들어오기 하는데, 현실적으로 하숙집 아줌마와 하숙생의 간간한 러브스토리 정도이다. 말죽거리 잔혹사에 나오는 떡볶이 아줌마로 빙의하여 "우리 땡땡이 하고 싶은거 다 해' 라는 명대사를 날려봐도, 현실은 "옥상으로 따라와 띠바새끼야!!!"로 돌려받는다.


현 남편 전 남자 친구에 대한 실종신고 제도가 시급하다.


무튼,

나의 워치에 대한 열정은 굉장히 뜨겁고 강렬하였고

가지고 말았고,

그 사랑은 차갑게 식었다.


강렬한 사랑의 기억,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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