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먹음의 묘미

단풍나무처럼 살기로 한다

by 도토리

아침 날씨를 확인하러 창문을 열었더니, 오늘은 제법 포근한 공기가 느껴진다.

계절의 회전목마가 방향을 잃은 듯하다.

어제와 그제는 가을이라는 계절이 사라진 듯이 추워서 몸서리를 치게 만들더니, 어제 낮부터 '많이 놀랐죠? 사실 나는 가을이었어요.' 하고 속삭인다. 날씨도 세상도 참 얄궂다.


좀 더 어릴 때는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가 멋지다고 생각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떤 상황이 와도 변하지 않는 굳센 기개와 정신을 대표하는 나무 아닌가.

그런데 30대가 되고 나서 보니, 관심도 없던 단풍나무가 그렇게 좋아질수가 없다.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색을 바꾸고, 자신을 희생시켜 생존할 줄 아는 그 영리함과 정신력, 유연함에 감탄을 하게 된다.

마치 젊은 시절에는 꼿꼿하게 자신의 고집만 부리다가, 나이가 들어 사는 방법을 알게 되고 사람들의 생리를 이해하게 되면서 살아남을 줄 아는 영리한 사람 같달까.


20대 초반, 대학생이었던 나는 지독하게 사회적 정의를 부르짖었다. 케케묵은 학생운동을 하겠다고 학생회에 몸을 담고 숱한 날들을 거리에서 노숙하며 밤을 지새웠다.

박노해의 시처럼, 혁명가가 살지 않는 가슴은 스무살의의 가슴이 아니라 했던가.

세상을 선악의 구도로 보고, 정확히 나쁜 놈과 착한 놈이 있다고 믿었다.

한번 아닌 건 아니라고 믿었다.

그리고 세상에 딱 떨어지는 정답이 있다고 믿었다.


조금씩 나이가 들고 40대로 향하는 지금은,

세상은 꼭 동전의 앞뒤처럼 명확하게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뭉툭한 칼로 케이크를 자르듯이 엉성하게 뭉개지는 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선악의 개념은 명확하지 않으며, 단면적인 사람과 상황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되었다.

그 시절 꼰대들이 말하듯, "사람이 너무 꼿꼿하면 못 써. 이리저리 갈대처럼 좀 흔들려 줘야 인간미가 있지."라는 말을 이제야 어렴풋이 좀 알게 되는 듯하다.



계절에 따라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단풍나무처럼,

시절과 상황에 맞게 나를 변화시키고, 인연에 연연하지 않으며, 소위 좀 더 융통성 있게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갈대같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삶

꼿꼿하게 서 있다가는 이내 부러지고 마는 세상살이에서, 유연함을 발휘하여 스스로를 지키는 삶으로.


소나무의 인내와 단풍나무의 변화로. 자신들의 방식으로 계절을 완성하는 그네들의 생처럼.

나이먹음의 묘미는 여기서 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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