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에 금괴라도 숨겨놨니?
요즘 남편들 사이엔 신박한 여행 트렌드가 있다.
이름하여 ‘화캉스!’. 화장실과 바캉스를 합친 말인데, 호텔도, 캠핑장도 아닌 화장실에서 즐기는 휴식을 일컫는다. 우리 집 남편도 그 트렌드의 선두주자다.
그는 매일 저녁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챙긴다.
그리고 마치 소풍이라도 가듯, 머쓱하게 웃으며 “어우, 배가 아프네…” 하고 사라진다.
10분, 20분, 40분.
나는 처음엔 정말 남편이 어디 아픈 줄 알았다. 배가 아프단 말을 자주 하니, 어디 장이 안 좋은 건지, 소화가 안 되는 건지 진심으로 걱정했다. 혹시 치질이 있어서 고통받고 있는데 나한테 숨기는 거냐고 떠보기도 하고, 애인이 따로 있어서 몰래 연락하느라 화장실에 숨어있는 거냐고 눈을 흘기기도 했다.
그런데 기우였다. 남편은 매일 화려한 화캉스를 떠나고 있었다. 변기에 앉아 명상을 하고, 유튜브를 듣고, 세상의 부조리를 성찰하며, 직장 상사의 욕을 한다.
샤워하는 시간도 그렇다.
나는 샤워를 15분 만에 끝낸다. 15분이면 머리 감고, 세수하고, 양치하고, 바디워시 하고, 바닥 청소까지 끝낼 수 있다.
그런데 남편은 다르다. 그는 갈아입을 속옷 안에 휴대폰을 넣고 쓱 사라진 후, 공용공간에서 자취를 감춰 놓고, 최소 30분 동안은 샤워를 시작조차 하지 않는다. 애착 변기에 앉은 그는 일상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세계로 여행을 떠난다. 유튜브, 주식 뉴스, 틱톡, 텔레그램, 알뜰살뜰 앱테크까지. 손가락으로 방문해야 하는 관광명소가 넘쳐난다. 그리고 그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샤워를 시작하려고 보면, 이미 30분은 지나있는 거다.
포털사이트에 남편이 화캉스를 떠나는 이유에 대해 검색해보면 이렇게 나온다.
“남편들이 화장실로 도망치는 이유는, 가정 내 역할 부담, 독립 공간 부족, 스트레스 해소 욕구 혼자 있을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황당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다.
첫째. 가정 내 역할 부담?
퇴근한 남편한테 밥을 차려주고 나면, 아이 숙제를 봐주는 것도, 설거지를 하는 것도, 책을 읽어주는 것도 다 아내인 내 몫이다. 어떤 점에서 부담을 느끼시는지?
둘째. 독립 공간 부족?
우리집은 처음부터 알파룸을 남편 컴퓨터방으로 정했다. 드레스룸으로 만들기에는 부부가 옷이 많지도 않고, 서재처럼 꾸며서 코딩도 하고, 게임도 하고, 주식도 편히 보라고 만들어 놨다. 컴퓨터 방에 과일과 과자, 맥주를 가져다 주는 아내가 있는데? 남편의 코골이 때문에 나는 거실에서 자는데, 안방과 연결된 알파룸까지 가져놓고 독립 공간 부족?
"꼭 그렇게 다 가져야 속이 후련했냐!
마지막 셋째.
스트레스 해소 욕구.
아...이건, 오케이다. 가정을 책임진다는게 얼마나 부담스럽고 힘들겠나. 회사도 주식도 부동산도 다 내맘같지 않고, 나이 들어갈수록 일자리는 불안하고, 젊은 세대들한테 자꾸 밀리는 기분,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까.
그런데, 백번 이해하고도 남는데, 그게 왜 화장실이냐, 이 말이다. 전생에 도자기 장인도 아니고, 왜 변기 위에서 평화를 얻고, 자유를 찾냐는 말이다.
분노를 누르고 차분히 생각을 해 보기로 한다.
남편을 보며 현대인들이 얼마나 자신만의 온전한 공간을 갈망하는지 알 것 같다. 화장실은 남편에게 단순히 용변을 보거나 씻는 공간을 넘어서서, 정신적 해우소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아무도 부르지 않고,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작은 개인의 공간. 그는 거기서 하루의 피로를 흘려보낸다.
그는 시간을 낭비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회복 중이었던 거다.
어쩌면 남편들에게 화장실은 마지막으로 남은 ‘사적인 공간’ 이지 아닐까? 와이프 눈에 띄는 순간 계속 잔소리를 들으니까, 눈에 안 띄는 장소로 몸을 은폐, 엄폐하는 거다. 군대에서 배운 위장 기술을 응용하는 건가?
나는 남편이 출근하고 아이가 학교 가면 혼자서 집을 다 쓰는데, 그는 늘 우리와 함께여야 하니까. 가족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온전히 혼자이고 싶은 순간도 있는 거다.
어쩌면 부부의 평화는 ‘같이 있는 시간’이 아니라 ‘각자 쉴 수 있는 공간’을 인정해 주는 데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화장실 하나를 두고 벌어진 전쟁이, 결국은 공존의 연습이 되는 세상.
그게 남편의 화캉스에 대한 나의 결론이다.
"그런데 화장실이 그렇게 좋으면 그냥 거기로 밥을 넣어줄테니까, 거기서 밥도 먹고 잠도 자. 나오기만 해,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