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로 아이의 방학이 열흘째에 접어들었다. 이제 제법 큰 티가 나는 아이는 방과 후 수업도 혼자 씩씩하게 다녀온다. 방학이라 같이 갈 친구도 없으니 산책 삼아 데려다주겠다고 해도, 아이는 한사코 손사래를 친다. 예전 같으면 서운했을 텐데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혼자 걷는 그 시간 동안 아이는 머릿속으로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고 마음껏 공상하는 중이라는 걸. 엄마의 존재는 그저 "한눈팔지 말고 빨리 가"라고 재촉하는, 몰입의 방해꾼일 뿐이다.
아이의 독서 취향도 한껏 선명해졌다. 요괴, 귀신, 퇴마, 마법... 남들이 좋다는 베스트셀러 시리즈를 들이밀어도 아이는 시큰둥하다. 요즘 아이의 마음을 뺏어간 건 ‘퇴마부’라는 소설이다. 그 책을 읽는 아이를 가만히 보고 있자면, 예전의 내 모습이 겹쳐 보여 퍽 웃음이 난다. 초등학생 때 <드래곤 라자>나 <퇴마록> 같은 판타지 소설에 빠져 매일같이 도서대여점을 드나들던 나, 그리고 <의천도룡기> 같은 무협지에 열광했다던 남편. 그 시절 우리가 느꼈던 그 공상의 세계를 아이도 지금 지나가고 있는 모양이다.
문득 1학년 때의 겨울방학이 떠올랐다. 그때의 나는 뭐가 그렇게 급했을까. 비장한 마음으로 권장도서 목록을 뽑고, 좋다는 연산 문제집들을 검색하고, 한 학기 선행 학습을 챙기고, 도슨트 수업이며 박물관이며 아이를 끌고 다니느라 참 바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깨닫게 된다. 아이를 어디든 데리고 다니는 것보다, 아이에게 스스로 채울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주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걸.
학교에서 만들어 온 아이의 계획표에는 자기가 진짜 하고 싶은 것들이 빼곡했다. 직접 쓴 이야기를 완성해서 출판사에 보내기, 이모티콘과 게임 만들기, 노래 가사를 쓰고 외워서 인기 많아지기 등.
이렇게 명확한 목표가 있는데, 내가 굳이 나서서 무얼 더 보태야 할까.
지금 내가 할 일은 아이가 컴퓨터를 편하게 쓸 수 있게 자리를 비켜주는 것,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고르도록 도서관에 데려다주는 것, 그리고 혼자 충분히 생각에 빠질 수 있게 내버려 두는 것이다.
아이가 자기만의 성을 쌓는 동안, 나 역시 곁에서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며 책장을 넘긴다. 아이와 나 사이의 거리는 조금씩 멀어지고 있지만, 아이가 고개를 돌렸을 때 언제나 그 자리에 엄마가 있다는 것만은 알게 해주고 싶다.
그게 내가 아이의 십 대와 처음 마주하며 배운, 가장 귀한 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