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서에 찍힌 빨간 도장의 무게

by 셀앤서

사람들에게 처음 와인을 접했던 순간이 언제냐고 물으면 로맨틱한 분위기의 추억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단기 판촉이라는 일로 처음 와인을 마셔보게 되었다. 와인 판매에서 신기한 것은 매일 행사용 와인을 개봉한 다음 소량의 시음을 하는 것이었다. 개봉한 와인의 상태를 확인을 하는 작업이었다. 비록 물류가 가득 쌓인 마트의 창고였지만 그렇게 나는 와인을 처음 마셔보게 되었다.


“음... 이걸 왜 마시지?"


처음으로 와인을 마셔 본 나의 반응이었다. 특히나 레드와인 품종인 까르베네쇼비뇽은 포도향과 쓴맛이 공존해서 나에게 생소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이게 와인에 푹 빠지게 된 계기가 되었을 줄이야. 그렇게 와인 테이스팅을 마치고 나면 큰 드럼통에 개봉한 와인과 일회용 컵을 챙겨서 마트의 주류 코너로 이동해야 했다. 판촉용 매대였던 큰 드럼통은 바퀴가 없었기 때문에 최대한 조심스럽게 통을 이끌고 정해진 자리로 갔다.


“호주 와인입니다. 시음해 보고 가세요.”


내가 선 자리는 마트의 주류코너 한쪽이었다. 여기서 지나가는 고객들에게 와인 시음을 권하고 와인을 판매했다. 와인 시음 행사를 하면서 보는 고객은 커플이나 부부 단위가 많았데 반응은 다 달랐다. 서로에게 권하도 하고 이제 술 좀 그만 마시라며 잔소리를 하기도 했다. 어떤 모습이든 간에 와인 시음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


여느 때처럼 한창 바쁘게 근무를 하던 어느 날 바지 뒷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휴대폰을 꺼내 살짝 확인해 보니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다. 지역번호인 것으로 보아 어떤 기관이나 회사에서 연락이 온 것 같았다. 곧 점심시간이라 나는 서둘러 자리를 정리한 다음 창고로 걸어가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지원하신 회사 인사 담당자인데요. 혹시 이번 주 금요일 면접 가능하실까요?”


얼마 전 지원서를 제출한 기업의 전화였다. 계속된 탈락에 자존감이 낮아져 있었던 나는 드디어 서류를 합격한 곳이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 그런데 잠깐. 금요일이면 와인 판촉 아르바이트랑 일정이 겹쳤다. 혹시나 정 변경이 가능한지 물었지만 기업에서는 어렵다고 답했다. 면접 시간은 오후 1시. 정확히 근무 시간과 겹치는 상태였다. 전화를 끊은 나는 파견 업체 담당자분께 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취업 관련 면접으로 근무 시간 조정 가능한지 물었다.


연히 스케줄을 조정하고 면접에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안된다는 답변에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이대로 포기할 수 없어 재차 부탁을 드리자 담당자는 가능 여부를 다시 확인해 본 다음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점심도 먹지 않은 채 마트의 창고 한편에 앉아서 초조하게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점심시간을 십 분쯤 남겨둔 시점에서 업체 담당자로부터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말씀하신 부분 확인했는데 근무를 빠지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작성하신 단기 근로 계약서에 따라 정해진 일자에 근무를 하지 않거나 중간에 빠지시면 손해배상 청구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짧은 문자였지만 그 안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손해배상이라니. 사회초년생이던 나에게 계약서의 법적 용어는 두려움을 느끼기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동안 많은 일을 했지만 계약서는 형식상 작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형식 속에는 내가 어겨서는 안 되는 수많은 조건이 나열되어 있었다. 면접에 가지 못한다는 사실이 확실해지자 내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어떻게 온 면접 기회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속상했다.


인생 전체를 놓고 봤을 때 더 중요한 것은 면접이라 무단으로 일을 빼고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양심상 그런 선택을 차마 할 수 없었다. 결국 마트 창고 구석에 앉아 좋은 기회를 주셨지만 안타깝게도 면접에 참석하지 못할 것 같다는 메일을 썼다. 그리고는 한참을 망설인 끝에 인사담당자에게 메일 발송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띠리링-’


휴대폰에 맞춰놓은 휴식시간 종료 알람이 울렸다. 서둘러 눈물을 훔치고 다시 나가서 와인을 판매할 준비를 시작했다. 부족한 종이컵 여분도 더 챙기고 나가기 전 거울을 보고 혹시나 화장이 번지지 않았는지도 확인했다. 눈과 코가 조금 빨갛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티는 안나는 것 같았다. 창고에서 마트로 나간 나는 온몸에 에너지가 다 빠진 듯 힘이 없었다.


“무슨 일 있어요?”


마트의 와인 코너에서 근무하던 직원분이 말을 걸었다. 그동안과는 다른 안색에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물어본 것이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그분은 내 편을 들어주며 그런 못된 업체가 있냐며 나 대신 얼굴이 빨개지도록 화를 내주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상한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떠오르는 감정을 애써 눌러 놓은 채 그날의 근무 시간을 꽉 채웠다. 그 와중에 와인 판매는 잘 되어서 괜찮은 판매 실적을 내게 되었다.


“이거 와인 처음 시작할 때 추천하는 와인인데 선물이에요.”


지막 근무 날, 집에 가려는 나를 붙잡고 와인 매장에 있던 직원분이 선물을 건넸다. 예쁜 모양의 병에 담긴 스파클링 와인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받아보는 와인 선물이었다. 미안한 마음에 거절했지만 그동안 판매를 잘해줘서 매출에 많이 도움이 되었다며 내 손에 와인을 꼭 쥐어주었다. 그렇게 나의 노력을 인정받자 지난 며칠간 속상했던 마음이 조금은 녹는 기분이었다. 비록 면접을 가지는 못했지만 이 와인 한 병으로 나의 선택이 헛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위로를 받게 된 것이다.


당시 나에게 더 중요했던 것은 취업 면접이었고 이후 내 선택을 들은 주변 사람들 련했다며 놀리기도 했다. 하지만 만약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나는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맞는 방향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일을 잘하기 위해서는 타인에게 신뢰를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나 역시도 이 말에 동의한다. 당장의 눈앞에 보이는 열매를 따 먹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먹을 것이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야 하는 신뢰라는 것이 있다. 나 역시 이 경험으로 일을 할 때 지켜야 하 책임의 무게를 느끼게 되었다.


지금도 나는 일을 할 때 신뢰를 최우선으로 한다. 욕심이 나더라도 내가 완벽하게 해낼 수 있는 일만큼만 일을 잡는다. 혹시나 누군가 대충 해도 된다고 이야기를 하더라도 이 신념에 따라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한다. 이런 성격 탓에 여전히 나는 때때로 손해를 보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런 신념이 나를 지지해 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뢰를 저 버린다는 것은 타인을 잃는 것뿐만 아니라 내 양심을 잃는 최악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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