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장에 쏟은 맥주 1700cc

by 셀앤서

대학교가 개강하면서 수업과 학회 활동 그리고 일을 병행하기 위해서는 근무 스케줄을 조정할 수 있는 일자리가 필요했다. 그렇게 구하게 된 곳은 레스토랑 컨셉의 치킨 매장이었다. 당시 나는 몇 번의 아르바이트 경력으로 어디서 일을 잘할 수 있다는 크나큰 착각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나의 생각이 바뀌게 된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근무했던 매장은 1.5층으로 옛날 타자기나 조명을 진열한 고풍스러운 느낌이 가득한 곳이었다. 치킨 또한 다양한 퓨전 메뉴가 많아 지금도 있었다면 SNS에서 꽤나 핫했을 만한 컨셉이 확실한 곳이었다.


"트레이를 그렇게 들면 안 되지. 다시 해봐."


가게 만의 특별한 컨셉 덕분인지 근무를 하기 위해서는 익혀야 하는 규칙이 많았다. 서빙을 할 때 트레이를 한 손으로 드는 방법, 테이블에 집기를 놓는 순서와 위치, 그리고 손님에게 주문을 받는 절차까지도. 매장에서 제공하는 대부분의 서비스가 레스토랑과 비슷했다. 근무 초반에는 이러한 매뉴얼을 일일이 외우느라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자고로 치킨이란 아무렇게나 줘도 맛있는 음식인데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라는 의문을 품기도 했었지만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매장의 체계적인 시스템과 차별화된 운영 방식은 정확히 타깃 고객의 마음을 움직였다. 가게의 인기는 날로 높아져 갔고 그로 인해 방문하는 손님의 숫자도 자연스럽게 늘어갔다. 바쁜 매장에서 그렇게 매일 혼나고 일을 배우던 어느 날 충격적인 사건 하나가 터지고 말았다. 다른 사람의 요청으로 근무시간을 바꿔준 나는 평일 점심시간에 일을 하고 있었다. 저녁과는 달리 손님이 적어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던 그때, 가게문을 열고 말끔한 정장을 입은 남자 두 분이 가게에 들어왔다.


손님은 바의 앞 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다음 가게에서 제일 인기 있는 치킨 한 마리와 맥주 1700cc를 시켰다. 기본 세팅을 마친 뒤 맥주를 먼저 드리기 위해 기계에서 맥주를 뽑아 잔과 함께 들고 테이블로 이동했다. 그 순간 나는 바닥의 무언가에 걸린 듯 발을 휘청거리기 시작했고, 그대로 나와 정면으로 바라보고 앉아 있던 손님의 옷에 맥주를 쏟아버렸다. 그것도 1700cc 전부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순간 가게에는 정적이 흘렀다. 뒤늦게 상황을 인지한 나는 죄송하다고 연신 사과를 드리며 챙겨 온 수건으로 미친 듯이 손님의 옷을 문질러 닦기 시작했다.


하지만 맥주 1700cc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이미 손님이 입고 있던 셔츠를 넘어 재킷, 바지, 양말, 신발까지도 홀딱 젖게 만들었다.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손은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입으로는 죄송합니다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분명 실수를 한건 나인데 당황스러움과 미안함에 눈물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그동안의 경험을 미뤄 보면 손님은 소리를 지르며 나에게 화를 낼 것이 분명했다. 그것이 그동안 내가 겪은 사회에서 실수에 반응하는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다 젖어버린 얼핏 봐도 비싸 보이는 양복과 구두를 보며 내 머릿속은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학생 아니에요? 오늘 학교 안 가고 알바 중인 거예요?"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손님의 반응은 예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소리를 지르기는커녕 오히려 차분한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어서 고개를 들고 손님을 살짝 올려다봤다. 엄청난 실수에 당황스러워 어쩔 줄 몰라하는 내 표정과는 다르게 정작 맥주 쏟음을 당한 손님은 재밌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만약 나였더라도 울그락 불그락한 얼굴로 소리를 지르며 이게 무슨 짓이냐고 화를 냈을 것 같았는데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네... 오늘 공강이라서 근무하는 중이에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 공강. 좋네요. 저도 어차피 미팅 끝나고 집으로 갈 거라서 괜찮아요."


손님은 업무 미팅을 마친 뒤 동료와 함께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잠시 들렀다고 했다. 그리고는 겁에 질려 걱정하는 나를 보고 오히려 괜찮다며 안심시켰다. 뒤늦게 상황을 눈치채신 매니저님이 뛰어와 손님께 정중히 사과를 했다. 그리고는 세탁비라도 드리고 싶다며 죄송함의 뜻을 전달했다. 손님은 괜찮다며 그저 흘린 맥주가 아까우니 맥주만 새로 다시 가져다 달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잔뜩 젖어버린 재킷만 소파 한쪽에 벗어 두고는 계속해서 식사를 이어갔다. 젖은 옷과 신발이 얼마나 축축할지, 몸에서 나는 맥주 냄새가 얼마나 심할지 직접 겪지 않아도 알 수 있어서 너무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옷이 다 젖는 큰 일을 겪었지만 손님은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마무리 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계산을 하기 위해서 카운터로 향하면서도 나에게 괜찮다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매니저님은 한사코 거절하는 손님께 세탁비를 드리고 음식 값은 받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나를 카운터 앞에 불러 일한 지 얼마 안 되어 실수한 것이라며 다시 한번 정중하게 사과를 드렸다. 손님은 괜찮다며 오히려 음식이 너무 맛있었다는 말과 함께 가게를 나섰다.


그렇게 손님이 가고 난 뒤, 나는 자리에 남은 맥주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진땀을 빼야 했다. 양동이에 물을 받아 밀대 걸레를 계속 빨아가며 바닥의 찐득함이 사라질 때까지 닦고 또 닦았다. 그리고 하나 더. 바닥 청소를 끝내자마자 매너저님께서는 나를 따로 사무실로 불렀다. 그리고는 덤벙대며 일하는 것에 대해 눈물 콧물 다 빼게 한참 동안이나 혼을 냈다. 손님은 나를 용서했을지 몰라도 매니저님은 나를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날 맥주를 쏟으며 떨어진 심장과 함께 알 수 없던 나의 자신감도 다시 제자리로 내려왔다.


일을 하다 보면 누구나 실수를 저지르고는 한다. 자신의 실수를 처음 발견하게 되는 그 순간은 정말 등골이 오싹할 만큼 끔찍하다. 당장 이 상황을 피하기 위해 쥐구멍에라도 숨어버리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들어갈 만큼 큰 구멍은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세상은 우리에게 실수하지 말라고 이야기는 하지만 정작 실수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실수를 하게 되었을 때 해야 하는 것은 단 두 가지이다. 그것은 바로 실수를 인정하고 다시 바로 잡는 것이다.


평생 실수를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고 또 성장하게 된다. 나 역시도 그랬다. 이때의 경험은 나에게 타인의 실수를 너그럽게 이해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렇게 수많은 실수를 했던 과거가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의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마음을 베푸는 어른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사회는 냉혹하다고 하지만 온기를 간직한 곳은 여전히 남아 있다. 작은 온기로라도 누군가의 실수를 감싸 안아줄 때 그 사람은 한 뼘 더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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