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신 ep.15 성적표

by Celloglass

며칠을 쉬고 난 뒤 직원들이 있는 사무실로 돌아왔다. 책상 앞에 앉자 허탈감이 먼저 밀려왔다. 지난 일 년의 시간이 떠올랐다. 밤을 새우며 기획하고, 직접 사람들과 하나하나 만들어 냈지만 결과는 결국 철수였다.


나는 처음 선택의 순간을 되돌아봤다. 기자의 질문 하나가 내 마음을 흔들었고, 그 흔들림을 붙잡겠다며 덜컥 계약서를 쓰고 적진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때의 자신감이 단 한 번의 좌절로 꺾일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주저앉아 좌절하는 모습은 내 방식이 아니다.


우리가 받은 성적표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초라하지도 않다. 그 위에는 분명 가능성과 한계가 동시에 적혀 있었다. 길을 만들면 사람이 따라왔고, 사람은 다시 길을 키웠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그 길을 무너뜨렸고 우리는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배운 건 분명했다. 길은 건축으로 만들 수 있지만, 자본시장은 공동체와 함께 조율해야 하고, 제도를 개선해야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는 과거의 배움으로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야 한다.


몇 주가 흘렀을까. 마음을 달래려 기사를 넘기다 ‘지방 인구 소멸’이라는 문구에서 시선이 멈췄다. 출산율 0점대, 면 단위 행정구역의 절반 이상이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는 기사였다. 젊은이들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노인들만 남아 있었고, 학교와 시장은 문을 닫았다. 도시로 향한 기회는 젊은이들을 뺏어갔고, 그 자리는 빈 장소를 남겼다. 불과 몇 개월 전 우리가 활기를 불어넣었던 그 골목과 많이 닮아 있었다.


나는 슈퍼맨은 아니지만, 그런 곳에서도 할 수 있는 게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그곳에서는 대형 프랜차이즈와 경쟁할 일도 비싼 임대료에 쫓겨날 일도 없지 않은가. 그런 공간이라면 내가 다시 시험대에 오를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나는 지도 앱을 열었다. 인구 소멸 위기 지역을 표시한 붉은 점들이 화면에 가득했다. 그중 가장 진한 색으로 칠해진 지점을 눌렀다. 도로 표기는 끊겨 있었고, 주소 검색은 엉뚱한 장소가 나왔다. 위성사진으로만 겨우 농로 길과 밭의 형태만 확인할 수 있었다. 마을 이름도 확인할 수 없는 곳이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마음이 끌렸다. 지도에서조차 존재감이 없는 그곳이,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뤄낸 결과가 나를 힘들고 지치게 했지만, 그 과정 속에서 내 마음은 더욱 단단해져 있었다. 지금 나는 실패 속에서 길을 찾았고, 무너짐 속에서 가능성을 보았다.


이제 나는 새로운 곳으로 향한다.

지도에도 없는 마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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