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는 절대 권력이 있다. ‘이장님’이다. 이 마을의 대통령. 어느 마을이든 이장님을 통하면 청와대까지도 연결될 것이다. 그분의 말씀이 곧 법이고 진리다.
오늘은 이장님 댁에서 점심을 먹기로 한 날이다. 나는 미리 마트에서 정종 몇 병을 사두었다. 어르신들에게 정종은 여전히 고급주다. 요즘처럼 술이 넘쳐나기 전, 정종은 귀한 자리에서만 마실 수 있는 술이었다.
조금 일찍 도착해 마을회관에 들러 인사를 드리고 걸어서 이장님 댁으로 향했다. 몇몇 어르신도 함께했다. 시골은 그렇다. 한 집 밥상에 모여 끼니를 함께하는 게 일상이고, 그것을 정이라 여긴다. 요즘 세대라면 이런 관계가 불편하다 하겠지만, 그런 마음이라면 전원생활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기에 어르신들을 위해 정종을 준비했다. 끓인 물을 큰 그릇에 담고, 술 주전자를 담가 서서히 온기를 불어넣었다. 특별한 기술은 아니다. 그저 성의를 담은 방식일 뿐. 그러나 그 새로움 자체가 특별함으로 각인되었다.
“이게 뭐라? 이거 와 사왔노.”
어르신들의 반응은 호기심과 의심이 섞여 있었다. 그러나 곧 웃음이 번졌다. 막걸리에 익숙한 분들에게는 낯선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식사는 정종과 함께 화기애애하게 이어졌다. 나는 조심스레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드렸다. 서울에서 있었던 일부터 풀어냈다. “어디 그런 썩을 넘들이 있나”는 공감이 돌아왔다. 그 순간 나는 이미 이 마을의 아들이었다.
빈집들을 정비하고 농어촌 민박으로 활용해보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고랭지 밭을 둘러 마을이 형성된 것도 장점이라 강조했다. 내 눈에는 너무 완벽해 보였다.
농어촌 민박은 해당 지자체에 6개월 이상 거주하신 분들 중 자신의 집으로 민박을 운영할 수 있는 제도다. 난 이분들과 협동조합을 만들어 숙박업을 운영하고 싶은 것이다.
협동조합에서 출자해서 빈집들을 사들이고, 수리를 한 뒤 민박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개별 집들은 마을 분들에게 임차를 준 뒤 운영은 협동조합에서 하게 된다면 그 수익은 협동조합과 마을 주민들의 수익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어르신들에게는 너무 어려운 얘기였고, 내가 사기꾼처럼 보였을 것이다. 나라도 그랬을 테니. 그래서 제안을 드렸다.
“조합장은 이장님이 맡아주신다면 제가 사기 칠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당장 큰돈이 드는 일도 아닙니다. 하나씩 만들어가면 됩니다.”
잠시 방 안이 고요해졌다. 이장님이 나를 훑어보더니 낮고 무심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람 그냥 하믄 되잖나, 와 물어보노.”
“그람 자네가 알아서 추진해보드래요.”
그 한마디에 방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절대 권력자의 허락이자 신호였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우리의 거래는 성사됐다. 정종잔이 다시 오갔고, 웃음과 한숨이 뒤섞였다. 누군가는 옛일을 꺼냈고, 누군가는 내 등을 두드렸다. 정종 파티는 저녁까지 이어졌다.
나는 이미 가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