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19살은 잔인한 해다. 19살에, 평생을 좌우할 일생일대의 수능을 치르고, 그 종이 쪼가리 하나로 어느 대학에 갈지, 즉 남은 인생의 꼬리표가 결정된다.
내 19살은 카오스 그 자체였다. 고등학교 3학년 모의고사 성적표는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가뜩이나 다음 해에는 내신을 많이 본다고 조변석개하는 입시제도가 나를 압박했다. 사람들은 모두 고3 시기가 인생을 결정한다고들 했다. 나는 그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올해는 망했다'는 판단과 함께 아예 고등학교를 그만두는 선택을 해버렸다. 수능을 4달여 앞둔 여름이었다.
그렇게 친구들이 수능을 향해 달려갈 동안, 나는 '예비 재수생(?)'이라는 미명 하에 집에서 놀기 시작했다. 다행히 부모님은 내 이런 선택을 응원해 주셨다.
그렇게 집에서 독학 아닌 예비 재수생(?)으로 놀던 어느 가을날.
아버지께서 갑자기 불의의 사고로 머리를 다치시게 되었다. 집안은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났다. 평화롭던 우리 가정은 무너졌고, 어머니는 아버지 병상을 지키게 되셨다.
나는 그런 와중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놀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렇게 살다가는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백수가 될까 봐 덜컥 두려워졌다. 어머니를 졸라 서울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재수학원에 가게 되었다. 친척집에서 얹혀살게 되었다.
그 재수학원은 서울 강남 8 학군 출신들이 모이는 학원이었다. 주간반, 야간반, 주말반 합쳐 전 학원생이 3,000명인 전국 최고의 재수학원. 반 이름 자체가 우열반이었는데, 1반은 공부를 제일 잘하는 반, 11반은 제일 못하는 학생들을 모아둔 반이었다. 1반은 연고대를 붙고도 서울대를 가기 위해 오는 반이었고, 나는 9반에 배정되었다. 모의고사를 보면 소위 말하는 빌보드 차트 1등부터 100등까지 붙여 놓았다. 빌보드 차트 1등은 전국 1등이었다.
학원 바로 옆 지하철역 사거리에는 스타벅스가 있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스타벅스를 가봤다. 모든 메뉴가 너무 비쌌다. 나는 제일 저렴했던 에스프레소를 시켰다. 소주잔 만한 하얀색 도자기 컵에 나온 검정 물은 양이 적어도 너무 적었다. 에스프레소는 쓰기 그지없었다. '서울의 맛'이었다.
촌뜨기였던 나는 촌스러운 옷을 입고, 당시 유행하던 드라마 <커피프린스>의 윤은혜처럼 머리를 싹둑 자르고 절박함 하나로 공부했다. 목표는 서울대. 선생님들은 서울대가 아니면 대학도 아니라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남들이 서울대라고 외치니까 나도 서울대를 가기 위해 노력했다. 서울대를 가면 이 악몽 같은 상황이 한 번에 해결될 것만 같았다.
뇌 손상 회복을 위해 병상에 계신 아버지, 아버지를 간호하는 어머니, 그리고 고향 집에 홀로 남아 학교를 다니는 동생. 나는 절박하게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절박하고, 묵묵하게 공부했다. 9월쯤 되자 빌보드 차트에 처음으로 내 이름이 올라갔다. 그리고 수능 날이 다가왔다. 수능날은 늘 춥다. 11월의 새벽녘 파란 여명과 차가운 겨울 공기 속에 참치김밥으로 속을 데웠다. 김밥을 팔던 아주머니는 "김밥이 둘둘 말려서 문제가 잘 안 풀리면 어떡하냐"라고 걱정 아닌 걱정을 했다. 이 악담이 무색하게, 나는 소위 말해 '수능 대박'이 났다.
전 과목 1등급을 받은 수능 성적표는 마치 어느 곳으로든 갈 수 있는 특급 열차 티켓 같았다. 하지만 그 특급 열차를 타고 나 혼자 훨훨 날아가 버릴 수는 없었다.
내가 수능 공부를 하는 동안 아버지는 서울의 큰 병원에서 재활 치료를 위해 입원해 계셨다. 재활 치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뇌 손상은 회복 불가능한 상태였고, 병원에서는 평생 지적 장애를 안고 살게 될 것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그리고 아버지는 이제 누군가의 보살핌이 늘 필요한 분이 되셨다. 어머니는 그 절망스러운 사실을 받아들인 채 퇴원을 하기로 결정하시고, 아버지를 모시고 고향으로 내려오셨다.
아버지는 명문대를 졸업한 토목 기술사셨다. 우리가 크는 동안 집이 풍족하지는 않았어도, 어머니는 가정주부로 나와 동생을 돌보셨고 우리는 당장의 생계 걱정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가장을 잃은 집안에서, 나는 이 특급 열차 티켓을 어디에 써야 할지 고민해야 했다.
2000년대에는 조기 유학 열풍과 함께, 유학을 안 가거나 영어를 못하면 '루저'가 되는 듯한 분위기가 팽배했다. 대학 교수님들은 모두 미국 유학파였다. 내가 어느 분야를 가든, 해외 유학을 가지 않으면 우리나라에서 성공하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밋빛 미래를 상상하던 고3 학생이었던 나는, 이제 유학은 꿈도 꿀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만 공부해도 성공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한참을 고민하던 20살의 나는 국문학과 한의학밖에 없다는 답을 내렸다. 그리고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면 돈이 많이 드니, 집에서 학교를 다녔으면 좋겠다'는 어머니의 바람, 그리고 '한의사가 되면 적어도 생계 걱정은 하지 않지 않을까' 하는 현실적인 생각이 들었다. 내 티켓으로 나는 한의대라는 열차에 탑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