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에 숨어 있던 민들레 홀씨는 바람을 타고 다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이제 나의 목표는 더 이상 성적표나 취업, 혹은 현실적인 타협이 아니었다. 내가 진짜 배우고 싶은 것을, 세계의 중심에서 배우고 싶었다. 최고의 환경에서, 최고의 사람들과 공부해보고 싶었다.
집세를 아끼기 위해 다시 어머니가 계신 고향 집으로 돌아갔고, 경기도 이천의 비교적 업무 강도가 낮은 병원으로 옮겼다. 퇴근 후 저녁에는 독서실에서, 주말에는 강남의 영어학원에서 시간을 보냈다.
미국 유학을 위해서는 GRE라는 시험을 준비해야 했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영어 단어 3,000개를 외우고, 원어민도 어려워하는 <뉴욕타임스> 기사 문장 중간에 구멍을 뚫어놓고 단어를 채우는 시험은 상상 이상으로 어려웠다.
퇴근 후 어둑어둑한 독서실에 가면 잠이 쏟아졌다. 매주 주말마다 고속버스를 타고 강남 영어 학원에 갔다. 나중에는 주 3회 수업을 듣기 위해 학원 근처에 방을 얻고, 경강선 열차를 타고 직장과 학원을 오갔다. 그렇게 독하게 공부를 해도 성적은 좀처럼 오르지 않았다.
11월 말 지원 마감이 다가오는데, 9월이 되어도 성적은 제자리였다. 강남 테헤란로에 위치한 시험장에서 세 번째 마지막 시험을 치르고 나오던 날, 나는 죽어라 공부했지만, 어학원에서 '목표 점수'라고 말하던 기준치의 70%에도 미치지 못했다. 테헤란로 한복판에서 한참을 엉엉 울었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었다.
GRE가 끝나자 이번에는 토플이었다. 토플 기준점수조차 받지 못하면 원서를 낼 수 없었다. 새벽 네 시에 열차를 타고 강남 학원에 갔다가, 이천에 있는 직장으로 출근했다. 영어로 한마디도 할 줄 몰랐기에, 스피킹 시험을 위해 스크립트를 달달 외웠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던 나는 직장에 휴직계를 냈고, 엉덩이에 땀띠가 날 정도로 공부에 몰두했다. 결국 11월 초, 나는 최저 기준치 점수를 받아냈다.
처음 써보는 영어 에세이는 막막했다. 어떻게 시작할지도 감이 안 왔다. 주변에는 유학을 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인터넷을 떠돌아다니며 한 줄씩 고쳐나갔다. 그렇게 자기소개서와 에세이를 준비했다.
밤을 새워가며 영어 에세이를 쓰고, 하버드를 포함한 미국 15곳, 영국 2곳, 캐나다 1곳에 있는 보건대학원 석사 프로그램에 지원을 마친 건, 코로나가 전 세계를 휩쓸기 직전인 2019년 겨울이었다.
그리고 몇 달 후, 나는 그간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듯 하나씩 합격 통지서를 받기 시작했다. 이름만 들어봤던 명문대들에서 합격 통지를 받는 건 짜릿한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가고 싶던 "하바드"는 감감무소식이었다.
2월 말, 기다리던 이메일이 왔다. 기다리던 합격이 아니었다. "Wait list (대기자 명단)"였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한창 코로나19가 우리나라를 강타하기 시작한 2020년 4월 1일, 만우절 아침, 나는 거짓말처럼 하버드 보건대학원으로부터 합격 통보를 받았다.
합격 후 만사형통이었을까?
나는 합격 통보를 받고 기쁨이 아닌, 현실의 무게에 울었다. 아니나 다를까, 현실적이던 어머니가 축하한다는 인사 대신 물었다. “등록금은 어떡할 건데?”
그랬다. 하버드 보건대학원의 1년 등록금은 8천만원이 넘는다. 학자금 대출을 갚고, 대학원에 다니고, 학원에 다니느라, 나는 그만한 돈을 모아두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코로나는 전 세계를 덮쳤다. 미국에 가도 제대로 학교를 다닐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나는 학교에 이메일을 보내 입학을 1년 미루고, 다시 돈을 벌기로 했다. 모아둔 돈과 어학원에서 받은 약간의 장학금과, 어머니의 쌈짓돈을 털어 나는 보스턴행 비행기에 올랐다.
"하바드에서는..."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를 들었던 때로부터 10년 후, 나는 드디어 하버드 대학교가 있는 보스턴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