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영어, 미드 쉐도잉, 그리고 회화 학원까지
33살이 되던 여름, 나는 보스턴으로 유학 왔다. 어떤 분들이 보시기에 한창인 젊은 나이이지만, 보통은 20대 중반 늦어도 후반에는 유학을 가기 때문에, 남들과 비교했을 땐 사실상 좀 늦은 나이었다. 미국에 오기 전까지 나는 잠깐 나가는 해외여행을 빼고는, 영미권 국가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다. 대한민국 영어 교육에 맞춰서 수능을 풀고 토익을 공부했다. 나름 착실하고 성실하게 공부하는 학생이라 수능 영어는 1등급을 받았고, 토익은 990점 만점에 970점으로 만점에 가까운 성적을 받기도 했다. 남들은 그 흔하게 한 번씩 간다는 어학연수, 교환학생, 워킹 홀리데이는 먹고 사느라 기회가 없었다.
착실하게 한국식 시험 영어만 공부한 사람에게 스피킹은 공포의 대상이다. 수능 영어문제는 1분안에 풀 수 있어도, 외국인과의 1분 대화는 두렵기만 하다. 유학을 결심하고 미국대학원 입학을 위해 토플(TOEFL) 공부를 하고 미국 대학원 입학시험인 GRE를 준비했다. 토플 시험에는 스피킹 시험이 있는데 리딩, 리스닝 영역과는 달리 스피킹은 어느 날 하루아침에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사교육 공화국. 스피킹 실력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시험 점수를 고득점을 받는 노하우를 알려주는 학원에서 준 자료들을, 말 그대로 엉덩이에 땀띠 나도록 앉아서 달달 외웠고 나는 스피킹 최저 점수를 간신히 넘겼다.
나는 이미 한국에서 석사 학위가 있었기 때문에 미국 박사 과정 지원도 고려하고 있었다. 박사 과정은 보통 전액 장학금을 주고 생활비도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사 과정은 반드시 미국인 교수들과 구술로 인터뷰를 봐야 했는데, 나는 영어로 한마디도 스스로 문장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도, 자신감도 없었다. 다행히(?) 석사 과정은 대부분 내돈내산, 즉 자비로 가고, 워낙 지원자가 많기 때문에 따로 인터뷰를 하지 않는다. 나는 영어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탑 스쿨에 대한 열망으로 박사 과정 지원은 포기하고, 석사 과정만 20군데 가까이 지원을 했다.
그중 한 학교에서는, 나에게 탑 지원자(Top applicants) 중 한 명이라며 학장(Dean)과 그룹으로 인터뷰를 하면 그중 세명을 뽑아서 전액 장학금을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전액 장학금이라니! 심지어 랭킹도 높은 학교였다.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하지만 나는 영어로 말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 온라인 인터뷰에 코로나라서 안된다는 말도 안되는 핑계를 대고 가지 않았다. 천만다행으로 가장 가고 싶었던 학교였던 하버드에 인터뷰 없이 합격했다. 물론 합격 뒤에는 어마무시한 등록금이 기다리고 있었긴 했지만.
수능 영어 1등급이니까 영어 잘하겠지? 라는 기대는 "토익 만점이니까 외국인과 프리토킹 가능합니다" 와 같은 말이다. 토익을 살면서 단 한번이라도 시험쳐본 사람은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내 영어 스피킹 수준은 처참했다. 무엇보다 겪어보지 않은 일에 대한 마음 속에 자리잡은 막연한 두려움이 컸다. 누군가가 이태원이라도 가서 외국인을 만나보라고 하는데, 나같은 극 내향인에겐 불가능하다. 곧 미국에 가서 공부해야 하는데 영어를 한마디도 못한다? 출국 전까지 나는 죽어라 영어 말하기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물론, 돈을 벌어야 하므로 직장 생활은 계속해야 했다. 나는 흔히 영어 회화 실력 향상에 좋다고 알려진 모든 공부 방법을 시도해봤다.
1. 전화 영어
내가 했던 전화 영어는 필리핀에 있는 선생님과 카카오톡 전화로 일주일에 주 2-3회 15분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처음에 필리핀 선생님이라 필리핀 억양 때문에 못 알아듣지 않을까 걱정을 했는데 생각보다 괜찮았고, 선생님이 친근하고 나와 잘 맞는 성격이라 재밌었다. 전화 영어의 장점은 뭐니 뭐니 해도 나의 엉망진창 영어를 참을성 있게 들어주는 외국인이 있으므로 외국인 울렁증과 영어 스피킹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본인 스스로가 기초가 없으면 문장을 말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영어실력을 늘리기엔 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2. 미드 쉐도잉
"미드 쉐도잉만 하면 나도 외국인과 프리토킹 가능!" 수많은 영어 유튜버들이 외친다. 나도 그 유명한 미드 쉐도잉을 시작했다. 그 유명한 프렌즈 시즌 1 에피소드 1화로 시작했다. 그리고 프렌즈 시즌1 에피소드 1화가 끝이었다.
20분짜리 에피소드 1개를 미국 배우들이랑 똑같이 따라 하는 게 스피킹 비기너에게는 엄청 어려웠다. 계속 10번, 100번을 반복해서 듣고, 10번, 100번 반복해서 말하면 결국 되긴 된다. 엄청나게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결국 에피소드 1을 마스터를 했다. 여기에 나온 문장들은 아직도 기억이 나고, 가끔씩 말할 때 튀어나와서 그 효과는 실로 엄청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직장생활을 하며 어떻게 절대적인 시간을 투자할 것이며, 시간 대비 효율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인내심을 갖고 해 나갈 사람이 얼마나 될까?라는 의문이 남는다.
3. 영어 회화 학원 (내돈내산)
혼자 쉐도잉을 하다가 가성비가 너무 떨어지고 의지도 많이 약해졌다. 그리고 마음은 점점 급해졌다. 사교육 공화국 대한민국의 국민답게 영어 회화 학원을 수소문하기 시작했고, 강남에 있는 스피킹 전문학원 2-3군데를 알게 되었다. 나는 지방에 살았는데 당시 코로나 때문에 마침 온라인 수업을 하고 있어서 매일 저녁 온라인으로 수업을 2-3달 동안 들었다.
글로만 영어를 배운 사람들은 막상 "너 키가 얼마야?" 같은 문장도 쉽게 영어로는 안 나온다. 이 학원은 우리가 머리로만 알고 있던 문장들을 실제로 말을 해볼 수 있게 연습하고 훈련시켜 주는 학원이었다. 퇴근 후 줌(zoom)으로 거의 매일 수업을 듣고, 학원 숙제를 꼬박꼬박 하고, 연차를 쓰고 직접 가서 시험도 쳤어야 했다. 퇴근 후 영어 학원을 다니려면, 직장인은 퇴근 후의 쩌든 몸을 이겨내고 독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회화 학원은 도움이 됐다. 머리로만 알고 있던 문장들을 내뱉는 연습을 많이 하게 되었고 영어로 말하기에 대한 두려움을 어느 정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이 학원의 코스웍은 1년 과정이라 1년을 다했어야 하는데 나는 2-3달 정도만 하고 말아서 아쉬움이 좀 남는다.
이렇게 영어공부를 하다가, 출국이 1-2달 남아서부터는 비자 발급, 건강검진, 집 구하기 같은 출국준비로 인해서 영어공부도 다소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쯤 되니 "가면 어떻게 되겠지?"라는 반포기 심정과 일종의 깡(?)도 생겼다. 그리고 8월 드디어 미국 보스턴으로 오게 되었다.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여태까지 한국에서 공부한 것들은 헛수고였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