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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티사이즈 라떼

by 셀셔스

석사를 마치고, 나는 서울의 한 뇌 손상 재활 전문 병원에 취직했다. 지방에서 줄곧 살아온 나에게 서울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말로만 듣던 한강에 가 라면을 끓여 먹고, 홍대와 강남의 거리를 걸었다. 이제는 스타벅스 메뉴판을 보고 가격에 덜덜 떨며 에스프레소를 시키던 촌뜨기가 아니라, 제일 비싼 벤티사이즈 라떼를 주문할 수 있었다.


퇴근 후의 삶은 오색찬란하게 빛나는 듯했다. 화장품을 사고 꾸미고, 다이어트도 하고, 연애도 했다. 동호회에 나가고, 친구들과 밤새 웃으며 놀기도 했다. 취미생활도 시작했다. 운동한다고 퍼스널 트레이닝도 받았다. 바쁘고 화려한 일상이 내 삶을 채워주는 듯 보였다.


그러나 환자를 마주하는 순간만큼은 마음이 무거웠다. 환자에게서 아버지가 보였고, 보호자에게서는 어머니가 보였다. 낫지 않는 병 앞에서 지친 보호자의 표정 속에서, 나는 우리 가족을 보았다.


청첩장이 하나둘씩 도착하고, 나이 앞자리가 2에서 3으로 바뀌어갈수록 이상한 조급함이 밀려왔다. “지금 시기를 놓치면 좋은 인연을 만나기 어렵다”는 사회적 시선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결혼정보회사에 가입하고, 조건이 맞는 사람들을 소개받았다. 소위 ‘1등 신랑감’이라 불리는 이들과 마주 앉았다.


“우리 집은 평생 일을 안 해도 됩니다. 아이가 키 크고 영리했으면 해서 선생님께 관심이 생겼어요.”

“파트너 변호사가 되려면 연애할 시간이 없습니다. 바로 결혼할 분을 찾고 있어요.”

“제 목표는 한강에 집을 사는 겁니다. 전문직인 우리 둘이 함께라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들은 나에게 과분한 분들이었다. 하지만 그 만남들은 나의 마음을 채우지 못했다..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더 넓은 곳에서 배우고 싶다’는 작은 바람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바람은 사회적 시선에 눌려 숨을 죽이고 있었다. “여자가 공부를 더 하면 부담스럽다”, “유학 갔다 오면 너무 나이 든다”는 말들이 가슴을 콕콕 찔렀다. ‘결혼 적령기’라는 사회가 정한 시간표에서 벗어나면 낙오자가 되는 듯한 사회분위기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1년 동안 결혼 시장을 떠돌았다.


하지만 누구를 만나도 마음 깊숙한 곳의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았다.


그즈음, 봉사 의사를 급히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일주일간 휴가를 내 인도로 향했다. 인도의 병원은 한국과는 전혀 달랐다. 건물 안에 침대 몇 개가 있는 게 전부였다. 약이 없어 우리가 가져간 약은 순식간에 동이 났고, 병원 밖에는 진료를 기다리는 줄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마지막 날, 마지막 환자를 보고 셔터를 내리는데, 바깥에서 “약을 한 알만이라도 달라”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가득했다.


그 순간, 마음속 어딘가에 숨어 있던 민들레 홀씨가 다시 바람을 만났다.

나는 내 삶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누군가의 조건이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공허하게 느꼈던 이유는 행복을 타인에게서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진짜로 공부하고 싶은 건지 깨닫게 되었다. 나는 환자 한 명 한 명을 보는 진료보단, 더 많은 사람을 한 번에 도울 수 있는 공부가 하고 싶었다.


한국에 돌아오자, 소개팅 앱을 모두 지우고 결혼정보회사에 휴면한다고 알렸다.

휴면 신청 전, 담당 매니저가 걱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결혼은 지금 아니면 더 어려워져요. 공부는 나중에도 할 수 있지만, 결혼은 타이밍이에요!.”

그 말은 현실이었다. 하지만 내 결심을 바꾸지는 못했다. 나는 짝을 만나는 일은 운명에 맡기기로 하고, 강남의 유학 학원에 등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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