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현실

by 셀셔스

"하바드"가 틔운 민들레 홀씨 한 알은, 현실이라는 차가운 북풍에 다시금 숨어버렸다.


나는 어느새 졸업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한의대 고학년이었다. 졸업 직후 한의사의 진로는 보통 세 가지로 나뉜다. 군 복무를 마치지 않은 남학생들은 대부분 공중보건의로 3년을 보낸다. 나머지는 일반 한의원에 부원장으로 취직하거나, 한방병원에서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밟아 전문의가 된다. 그리고 아주 극소수만이 대학원에 진학해 연구직으로 간다. 연구직에 대한 경제적 보상이 임상 한의사보다 덜하기 때문에, 그 길을 택하는 사람은 정말 드물었다.


한의대에서 6년을 보내면서, 나는 임상이 두려웠다. 환자를 치료하는 일은 높은 수준의 지식과 책임감을 요구했다. 나는 그 무게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주변 동기들과 선후배들은 빠르게 실력을 쌓아가며 멋진 한의사로 성장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대학원에 진학하면 등록금 전액과 생활비까지 지원한다는 공고를 보았다. '대학원에 가서 연구를 하면 임상을 하지 않아도 될까' 하는 솔깃한 마음이 들었고, 한의대 대학원 석사과정에 지원을 했다.


대학원 합격과 함께 6년의 한의대가 끝이 났다. ‘사는 것’이 아니라 ‘버티는 것’에 집중했던 시간이었다. 강의실, 시험, 과외, 통장잔고, 시험… 이 다섯 개가 전부였다.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기억할만한 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정신이 없어서 기억을 저장하지 못했다.

나의 6년 목표였던 '무사히 진급하고, 무사히 졸업한다'는 것은 이뤘다. 하지만 '무사히 학비를 낸다'는 목표는 절반만 이룬 셈이었다. 본과 3학년부터는 학업 부담이 너무 커져 과외를 줄일 수밖에 없었고, 그때부터 대출을 받고 다녔던 것이다. 나에게는 당장 갚아야 할 학자금 대출이 남아있었다. 대학원 진학은 뒤로 미루고, 먼저 돈을 벌기로 했다.

나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다른 지방으로 가게 되었다. 그렇게 낯선 곳에서 한의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집을 떠나 있는 동안 어머니와 동생의 부담이 커졌고, 몇 달 뒤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리고 그해 가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는 일을 정리한 뒤 몇 달 후 집으로 돌아왔다. 미뤄두었던 대학원 진학을 더 이상 뒤로 미룰 수 없었다. 마음이 준비되지 않았지만, 그 선택은 이미 오래전에 마음속에서 결정해 둔 길이었다.


다시 학생이 된다는 건, 익숙했던 삶의 무게중심이 바뀌는 일이었다. 진료실에서 환자를 만나던 일과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통계를 배우고, 영어 논문을 읽고 쓰는 과정은 처음 접하는 낯선 언어 같았다. 단 1년 동안의 직장생활이었지만, 다시 학생이 된다는 건 삶의 무게 중심이 완전히 바뀌는 일이었다. 그렇게 통계를 배우고 논문을 2년간 쓰며, 나는 성장했다. 내가 연구라는 일에 흥미와 적성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마 대학원에 가지 않았다면 절대 몰랐을 것이다. 지도 교수님은 내가 연구에 재능이 있다며 박사과정을 권하셨다. 내가 박사과정을 간다면, 어쩌면 30대 초중반이면 한의대 교수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쉼 없이 그 순간순간마다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하며 달려온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춰보고 싶었다.

keyword
이전 02화민들레 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