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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홀씨

by 셀셔스

그렇게 한의대 생활이 시작되었다.


20살의 그 겨울, 내가 '한의대'라는 열차에 올라탄 이유는 단 하나, '생존'이었다. 누군가는 클럽을 다니며 젊음을 즐길 때, 누군가는 명의(名醫)의 꿈을 꿀 때, 나는 다음 학기 등록금과 과외 스케줄을 계산했다.


한의대는 단 한 과목이라도 F를 받으면 그 학기 전체를 다시 다녀야 한다. 내 목표는 전공 자체에 대한 열정이 아니었다. '6년간 무사히 학비를 내고, 무사히 진급하고, 무사히 졸업한다.' 그게 전부였다.


그 무렵, 우리 가족은 새로운 생존 전략을 짜야했다. 어머니는 작은 독서실을 시작하셨고, 아버지는 낮 동안 주간 돌봄 센터에서 시간을 보내시게 되었다. 동생은 야간대학교를 다니며 낮에는 마트에서 짐을 나르거나 피자 주문을 받는 콜센터에서 일했다.


어머니의 생각대로 집에서 학교를 다니니 월세가 들지 않아 돈을 절약할 수 있었다. 그래도 등록금과 용돈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다행히 지방의 작은 중소도시는 수능 대박을 낸 '한의대생' 과외 선생에게 참으로 감사하게도 관대했다. 길고 긴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과외를 갔다. 평일 저녁마다 과외가 매일 있었고, 많게는 두 건씩 뛰었다. 주말이면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이동 시간을 쪼개가며 학생들을 가르쳤고, '하루 10명'을 가르치는 날도 있었다.


20살에 처음 시작한 '교육 서비스업'은 사탕 같은 돈 맛과 쓸개 같은 씁쓸한 맛을 보게 해 주었다. 스무 살짜리가 가만히 앉아서 하는 일 치고 정말 많은 시급을 받았다. 그렇지만 학생과 학부모님이 나를 내 수업을 마음에 들어 할까 안 할까 전전긍긍해야 했다. 학생의 표정 하나하나에 신경을 썼다. 과외를 잡기 위해 지역 교차로에 광고도 내고,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니며 전단지도 붙였다.

어느 날 처음으로 수업을 갔는데, 내 강의를 듣는 여학생은 2시간 내내 뚱한 표정으로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띵-' 하고 문자가 와 있었다.

"선생님과의 인연은 여기서 끝으로 해야겠네요. 하루치 과외비는 입금했습니다."

종종 과외가 빈 시간엔 어머니 대신 독서실 카운터에 앉아 있었다. 방학이면 아침부터 밤까지 과외와 독서실 알바를 반복했다. 그렇게 방학 두 달을 꼬박 갈아 넣고 나면, 통장에는 '딱 다음 학기 등록금'이 찍혔다. 숨 돌릴 틈도, 미래를 고민할 여유도 없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나 나는 본과 2학년이 되었다. 본과 2학년에는 엄격하기로 유명한 교수님이 한 분 계셨다. 마침 우리 윗 학년 때는 미국 방문 교수로 자리를 비우셔서 선배들은 내심 기뻐했었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 학년부터, 그는 '하버드 보건대학원'으로의 방문 교수를 마치고 막 귀국한 참이었다.


"하바드"를 경험하고 오신 교수님은 마치 신문물을 접한 개화기 지식인처럼 "하바드"에서 겪은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들려주셨다. "하바드"에서는 학생들이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와도, 학기가 끝나갈 때쯤엔 전문가가 되는 훌륭한 교육 시스템을 갖고 있다고 했다. "하바드"에서는 우리가 듣도 보도 못한 최첨단 연구들이 진행된다고 했다. "하바드에서는..."으로 시작하는 썰들에, 덮어두었던 '유학'이라는 환상으로 만든 민들레 홀씨 하나가 잠시 훅 하고 튀어나온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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