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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셔스 Jun 10. 2023

손녀의 파란 눈 남자친구

전라도 시골에서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아오신 우리 할아버지는 92세, 할머니는 88세이시다. 나는 그분들의 제일 나이 많은 손녀이다. 조부모님의 유일한 오매불망 소원은 나의 결혼이다. 나이가 찬 큰 손녀가 결혼도 않고, 애인도 없으니 늘 노심초사하시고 이제나 저제나 내가 결혼한다는 말을 하길 기다리고 계셨다.


2년 전, 미국 유학이 결정되고, 미국에 집도 구하고, 첫 학기 등록금도 다 내고, 드디어 출국이 목전으로 다가왔다. 조부모님께 내가 유학을 간다는 말이 차마 입에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순간이 다가왔다.


“할머니, 드릴 말씀이 있어요”


주름진 얼굴의 할머니의 눈망울이 갑자기 소녀처럼 초롱초롱해지신다. 내 입에서 결혼한다는 말이 나오길 기대 중이시다.


“결혼이 아니라... 제가 미국으로 공부하러 가요..."


할머니 얼굴이 순식간에 엄청나게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바뀐다. 80대 중반의 주름진 얼굴에도 기쁨과 실망이 한 순간에 바뀔 수 있단 걸 보았다. 예상했던 반응이지만 너무 죄송스럽다. 할머니를 안심시켜 드리기 위해 아무 말이나 지껄인다. “미국 가서 좋은 놈 만날게요" 라며 밑도 끝도 없는 약속을 한다. 할머니는 실망한 표정이지만, ‘애써 봐’라고 하신다.




2년 만에 한국에 가서 2주의 짧은 일정에도 세 시간을 차를 달려 조부모님을 뵈러 갔다. 두 분은 다행히 참 정정하시다. 우리 엄마는 이미 할머니에게 내가 미국에서 남자친구가 생겼음을 넌지시 말해두었다. 내가 짐을 풀고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자 마자, 할머니가 모르는 척 물으신다.


“미국에 애인은 있고?”


모르는 척하시는 모습에 짐짓 웃음이 난다. 휴대폰을 재빨리 꺼내 사진을 보여 드렸다.


“미국인 중에서도 참 이쁘게 생겼네”


얼굴을 보고 맘에 드신 후에는, 호구 조사를 하신다. 몇 살인지, 직업은 뭔지, 결혼 생각은 있는지, 가족은 어떤지. 제이의 식구들과 찍은 가족사진도 보여드렸다. 제이의 부모님 인상이 워낙 좋으시고 화목한 가정이라 할머니는 참 좋아하신다.


방에 누워서 티브이를 보시는 할아버지께도 제이의 사진을 보여드렸다. 이름을 물어보시는데 그의 영어 이름을 발음하기 힘들어하신다. 할아버지는 딱 한마디 하셨다.


 너보다 인물이 낫다




나의 결혼이 유일한 소원인 분들이지만 당장은 결혼이라는 선물을 안겨드리기는 힘들다. 꿩 대신 닭으로, 영상 통화로라도 남자친구가 실존함을 보여드리기로 했다.


제이에게는 영상 통화할 것이라고 미리 이야기를 해두었다. 간단히 한국어 교육도 시켰는데 "안녕하세요. 저는 제이에요"라는 말을 기억을 못 해서 ‘저는’을 빼고 "안녕하세요. 제이에요" 로 줄이기로 합의를 했다. “안녕히 계세요”는 도저히 안 되서 결국 포기 했다.


영통을 걸자 제이가 인사를 했다. 서로 딱히 할 말은 없다. 조부모님은 “예쁘게 생겼다”, “인물이 괜찮다”라고 하신다. 나는 이 말을 영어로 통역한다. 별 것도 아닌 말을 통역한 건데, 내가 영어를 참 잘한다고 두 분이 감탄하신다. 두 분이 제이에게 “우리 손녀딸 사랑해 줘서 고마워”라고 하셨다. 이 말을 통역하는 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고 갑자기 목이 메었다.


90년 가까이 시골에서 사신 분들이, 말도 통하지 않고 이름도 어려운 손녀의 파란 눈 남자친구를 이토록 환영해 주신다. 일 년 후 제이와 함께 찾아뵐 것이니 두 분 모두 건강하시기로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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