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개미

밥벌이의 소중함

by 아름다운 그레이

참 낯설다. 아직도 낯설다.

매일 아침 아이들이 등교한 후 소파에 철퍼덕 앉아 티브이를 보는 게 일상적인 나의 아침 풍경이었는데 이제 나는 아이들보다 먼저 집을 나온다. 17년 된 낡은 자동차가 창피하기도 하지만 아침 출근길 막히는 도로가 두려워 항상 일찍 나오는 편인데 이상하게 마음은 편하다. 그토록 원하던 직장에 다니고 있어서일까.

아이들을 케어하고 집안 살림을 하던 전업주부일 때에도 행복은 있었다. 좋아하는 티브이 프로그램을 실컷 볼 수 있고, 혼자 영화도 보고, 쇼핑도 아무 때나 내킬 때 마음대로 다녀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기쁨은 금세 한계가 왔다. 보통의 사람들은 1년 내내 날마다 쇼핑하고, 날마다 영화를 보지 않는다. 그렇다면 남은 건 뭘까.

자격증 공부? 독서? 운동? 물론 자격증도 땄다. 따고 싶었던 것들은... 독서는 틈틈이 했고 운동은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유일한 취미는 티브이 보기가 되어 버렸다. 간혹 같은 아파트에 사는 비슷한 나이의 여자들이 놀러 와 아이들 이야기, 치솟는 아파트값 이야기, 어느 마트가 싸다는 정보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하고 갔다. 그러나 이런 시간은 나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무의미한 시간을 보냈다. 그것도 꽤 오랫동안... 아이들은 무럭무럭 커서 열 살, 여덟 살이 되었고 이제 조금씩 내 손이 가는 일이 줄어들었다.

아이들이 등교한 후 티브이를 보던 다른 날과 똑같은 아침이었다. 그때 나는 이미 보았던 티브이 프로그램을 세 번째 보고 있었다.

'아... 지겹다.'

갑자기 지겹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팍 터지듯 일어나면서 이 현실이 몸서리치게 끔찍했다. 이 멀쩡한 몸뚱이를 놀리고 허구한 날 나는 뭐 하고 있는 걸까. 인생을 낭비하고 있구나. 시간을 의미 없이 보내면서 무언가를 허비하고 있다는 생각에 괴로워서 견딜 수 없었다. 아이들은 어떻게든 커갈 것이고 내 품을 떠날 텐데 그때 나는 지금처럼 집에 우두커니 앉아 혼자 티브이만 보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끔찍해서 견딜 수 없었다.


돈을 벌어야겠구나.

나는 나가야 한다.

나도 내 손으로 단돈 몇 푼이라도 벌어보고 싶다.

그렇게 아르바이트 어플을 뒤지고 취업 사이트를 뒤적이다 몇 년 전 빛의 속도로 낙방한 시험이 생각났다.

한 번만 더 해볼까?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한 번만... 죽을 듯이 덤볐는데도 떨어지면 깨끗이 포기하고 다른 일 찾아보자 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후 3개월을 말 그대로 '올인'했다.

그렇게 얻은 내 직장.

운과 노력이 이끌고 천지신명이 뒤를 밀어주었는지 그토록 원하던 직장을 얻게 된 것이다. 취직 전 회식에 갔다가 늦게 오는 남편이 부러웠던 적이 있었다. 나에게도 소속감이라는 걸 느끼게 되는 날이 올까? 재미없는 모임일지라도 나는 그게 부러웠던 날들이 있었다.


첫 월급날.

통장에 찍힌 숫자 일곱 자리를 천천히, 아주 천천히 보고 또 보았다. 숫자 하나하나를 나의 뇌 속에 각인시키고 싶었는지 핸드폰 화면 속의 숫자를 눈으로 읽으며 꾹꾹 눌러 담았다. 최저임금 수준이지만 그건 중요치 않다.

이게 행복이구나.

밥벌이의 소중함이 이런 거구나.

내 힘으로 돈을 벌어 아이들 입에 맛있는 음식 들어가게 하는 성스러운 노동의 가치. 남편이 벌어다 준 돈과는 다른 무언가 더 뿌듯하고 애틋한 돈. 내가 무엇이라도 하며 살고 있다는 작은 기쁨.


결혼 전에는 월급이 들어오면 무엇을 살까부터 고민하고 아무 생각 없이 써대기가 바빴는데 이제는 어떻게 쓰고, 얼마를 저축해야 할지 궁리를 한다. 오늘부터 나는 다른 때보다 행복한 겨울을 맞기 위해 부지런히 일하는 일개미가 되기로 했다.

그것도 넘칠 듯이 행복한 일개.

내일도 나는 웃으면서 출근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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