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날의 다이어리

믹스커피

by 아름다운 그레이

'기대'라는 단어만큼 쓸쓸한 게 있을까.

누군가에게 무엇을 얼마만큼 주었든 상대방의 의견을 조금도 알지 못한 채 혼자만의 상상을 더하여 결과를 기다리는 가장 어리석은 일.

나의 11살과 12살을 행복하게 해 주신 선생님이 계셨다. 철이 없고 항상 들떠있던 그때의 나는 오로지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노는 것이 인생의 행복이었던 꿈이 없던 아이였다. 그런 내가 그나마 의지를 가지고 꾸준히 해왔던 것은 다름 아닌 일기 쓰기였다. 그때는 일기 쓰기가 중요한 숙제여서 처음엔 억지로 시작했다가 나중엔 습관이 되어버린 일기 쓰기. 이유는 사소했다. 선생님께서 일기 끝자락에 남겨주신 짤막한 덧글이 좋았기 때문이다. 늘 인자하셨고 유쾌하신 기억으로 남아있는 선생님 덕에 그 시절 나쁘지 않았다. 나는 커가면서도 선생님께 종종 편지를 보내 안부를 여쭙다가 차츰 시간이 흘러 직장에 다니며 자연스럽게 선생님을 잊고 살았다. 살다가 한 번씩은 햇살 좋은 5월이면 선생님의 안부가 궁금했지만 굳이 연락처를 찾거나 편지를 쓰는 일을 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선생님이셨다. 이사를 준비하시다가 내가 대학교 졸업식 사진과 함께 보내드린 편지를 발견하시고는 생각이 나서 전화를 하셨다고 했다. 나는 뛸 듯이 반가운 마음에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늘 들떠있던 11살의 내가 된 것이다. 안부를 주고받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댁으로 찾아뵙겠다는 구체적인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24년 만에 뵙는 선생님. 나는 그날부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옷은 무엇을 입어야 할지, 선물은 무엇을 사 가야 할지, 아이들은 데리고 가도 될지 하나부터 열까지 걱정이 된 것이다. 그 시절 선생님과 추억을 공유했던 친구들에게 자랑삼아 약속을 이야기하고 하나하나 의견을 물어 입고 갈 옷과 선물이 정해지기까지 수선스러운 날 들이 계속되었다. 과연 선생님은 어떤 모습이실까.


오래되긴 했으나 50평이 넘는 아파트는 특별한 가구가 없어도 속이 편안한 느낌이 드는지 아이들은 소파 이곳저곳을 놀이터 삼아 재잘거리며 잘 놀았다. 곧 정년을 앞두신 선생님은 헤어스타일은 조금 변하셨지만 수척해 보이는 얼굴 속에서도 특유의 유쾌한 분위기는 남아있었다.

너무도 담담히 나를 맞아주시는 선생님. 그러나 나는 반가우면서도 어색하고 떨리는 기분에 두서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결국 무슨 대화를 나눴을까. 잠깐의 정적이 어색함을 타고 우리가 앉은 식탁 근처를 맴돌다가 내 시선 끝에 머물렀다. 그곳에는 믹스커피 한 잔과 빵이 조금 있다. 며칠 전부터 드시다 만 것인지 입구가 집게로 막아진 빵을 주섬주섬 열어 접시에 뜯어 놓으신 빵이다. 먹어보지 않아도 얼마나 푸석거릴지 알 수 있을 만한 그런 빵이었다. 그리고 저기 식탁 구석에는 며칠 전부터 전전긍긍하며 고른 몇 번 먹어보지도 않은 비싼 커피가 기다리고 있다. 어느 순간 나는 왜 저 커피를 바라보게 됐을까. 흔한 믹스커피가 맛이 없어서? 입에 넣으면 서걱거릴 것만 같은 맛없는 빵 때문에?

믹스커피와 빵 때문에 차츰 머릿속이 맑아졌을까. 어느 종교에 심취하여 인생이 바뀌었으니 너도 관심을 가져보겠냐 말씀하시는, 그 흐뭇함을 애써 감춘 듯한 표정을 마지막으로 이제는 그만 집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추운 겨울이었고 내 차는 13년 된 낡은 승용차였다. 주차장까지 따라 나오신 선생님 앞에서 나는 어쩐 일인지 빨리 사라지고 싶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선생님은 그 이후로 내가 사드린 머플러를 몇 번이나 두르시고 학교에 가셨을까. 그 커피는 몇 번이나 드셨을까. 아니, 드시긴 했을까. 나는 애초에 가지 말았어야 했을까. 왜 자꾸 내 머릿속엔 믹스커피의 느끼한 향이 둥둥 떠다니고 그 눅진한 향이 내 코 끝에 맺혀있을까. 내가 가져간 커피를 보며 비싼 커피를 사 왔냐고 좋아하시던 모습이 사진처럼 떠오르다가도 절반쯤 남겨놓은 믹스커피를 생각하면 힘없이 파삭거리며 흩어져 버린다. 흙탕물처럼 차가운 절반 남은 믹스커피.

너는 무엇을 기대한 거니. 대답을 못했다. 나는 왜 갑자기 씁쓸한 기분이 되었을까. 그 이후로도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알맞은 대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다만 선생님의 잃어버린 연락처를 찾지 않고 그대로 있을 뿐.


keyword
작가의 이전글흐린 날의 다이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