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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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서점 검색 창에 제목을 입력했다. <책 소개> 난에 쓰인 작가와 책에 대한 찬사가 휘황했다. 무엇보다, ‘키건의 정수가 담긴 작품’이라는 구절이 작가의 작품을 처음 읽을 예비 독자의 기대감을 쑥 끌어올렸다.
책이 왔다. 늦은 퇴근으로 지쳐 있으면서 굳이 책을 펼친 데에는 의무감보다 기대감이 크게 작용했다. 그런데 피로 때문인지 작품 때문인지 이십몇 쪽까지 읽다 보니 구체적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 그 찬사들이 미덥지 않아 졌다.
싱겁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하루하루가 그다지 다를 바 없는 일상 같은, 무색무취성….
무얼, 놓쳤을까…….
돌아가자, 처음으로. 맑은 정신으로……
이튿날 아침, 조금 일찍 일어나 출근 전에 책을 폈다. 되돌아가 다시 읽다 보니, 간밤에 무색무취로 느껴졌던 문장과 전개 들 사이에서 작은 역동이 느껴졌다.
펄롱은 현재 어엿한 상점 주인이지만, 예전엔 기술학교조차 졸업하지 못한 석탄 야적장 노동자였다. 열여섯 살 미혼모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어머니의 고용주 저택에서 얼마쯤 고용주의 보살핌까지 받으며 자란 덕에 넉넉하지 않을망정 안정된 성장기를 보냈다. 가톨릭교도이지만 개신교도다운 이름과 생활 습관을 갖고 있다. 이제 그는 살뜰한 아내와 재주 있는 다섯 딸을 부양하는 가장으로 스스로 ‘운이 좋다’[20쪽] 여기지만,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는 걸”[22쪽] 잘 알고 있다.
이전 문장들을, 비켜서고, 되짚고, 돌아서는, 나중 문장들. 그 문장들 사이에서 두 겹의 펄롱이 조금씩 살아 움직였다. 부양가족을 돌보는 가장으로 성실하게 일상을 살아가지만 문득 다른 삶을 상상하는 펄롱, 어린 시절 어느 크리스마스에 직소 퍼즐을 받지 못한 일이 사무치게 아프지만 그해 크리스마스에 받은 선물들이 지금의 자신을 키워냈다는 사실을 잘 아는 펄롱, 좋은 사람은 주고받는 것의 균형을 맞추며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 살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생각 자체가 특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펄롱.
문장들 사이사이에서 생겨나는 펄롱은 시종 살짝 어긋난 두 겹이고 이 어긋난 두 겹들이 다시 겹쳐지고 겹쳐져 조금씩 두터워져 갔다. 어느 날 아내에게 벌컥 화를 내는 펄롱으로, 수녀원장에게 은근히 저항하는 펄롱으로. 마침내, “사람들하고 잘 지낸다고 정평”[17쪽]을 얻어 지금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사람들과 ‘척지는’ 길을 택하는 펄롱으로.
살짝 어긋난 겹침들이 포개지고 포개진 인물 펄롱에게 익숙해진 우리는 수녀원으로 돌아가, 전날 두고 왔던 소녀를 데리고 나오는 펄롱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다. 더욱이 이때는, 아비 없는 자식으로 비웃음을 당해 온 세월 내내, 아비 없는 자식으로 살게 함으로써 아들의 사회적 위치와 경제적 처지를 애매하게 끌어올려두고, 실은 한결같이 곁을 지켜온 아비가 있었음을 알아챈 펄롱이 아닌가.
펄롱 자신의 엄마(세라)와 이름이 같은 소녀를 수녀원에서 데리고 나오는 펄롱의 선택으로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작품 안에 명확히 서술되어 있다.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면 어머니는 결국 그곳에 가고 말았을 것이다. 더 옛날이었다면, 펄롱이 구하고 있는 이가 자기 어머니였을 수도 있었다.” [120쪽]
이렇게 사람들과 ‘척지는’ 펄롱의 ‘올바른’ 선택은 나를 안심시키는가. 아니면 불안하게 하는가? 혹은 위로하는가? 아니, 씁쓸하게 하는가…… 아마 이 모두.
책을 덮어 책상 한 모서리로 밀어 두고 일상으로 머리를 돌리는 순간, 고개 드는 의문들. 불운해 본 적 없는 이들이 불운한 이들을 돌아볼 수도 있을까. 이어지고 이어지는 불운을 감내해 온 이들이 불운한 다른 이들을 돌아볼 수 있을까. 누린 행운은 안 보이고 당한 불운은 크게 보이는, 평범한 우리가 자신이 당했던 불운과 누린 행운을 모두 보는 펄롱이 될 수도 있을까. 살짝 어긋난 겹들로 인물의 두께를 지니게 된 펄롱의 선택은 독자에게 핍진하지만, 그 펄롱이 현실의 우리일 수 있을까.
이런!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게 만든 문장과 전개는 ‘두고 왔던 세라에게 돌아가는 펄롱’ 그 자체였나? 도입부에서부터 이미, 독자는 알아채지 못한 채 펄롱에 물들여진 셈인가?
P.S. 다른 물음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불운에 빠져 있으나 지나쳐지는 사람들? 우리가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1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