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국어 문어 사용 능력을 전이시키자
A학생과 B학생은 동갑이다. 둘 다 영어 유치원을 다녔고, 유치원 졸업 후에는 공립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두 학생의 부모는 같은 대학을 나왔고, 직업과 근무 환경도 유사하다.
만 7세 10개월에 실시한 검사에서 두 학생의 전체 지능은 110~115로 비슷했고, 하위 지표 역시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4학년 11월, 같은 검사를 다시 실시한 결과는 크게 달랐다.
A학생의 전체 지능은 130으로 향상된 반면, B학생은 99로 하향되었다. 특히 언어 지능과 추론 지능에서 격차가 두드러졌다. A의 언어 지능은 130(16세 10개월 이상), B의 언어 지능은 83(7세 1개월)이었고, 추론 지능은 A가 134, B가 100이었다.
이 수치는 학생의 지적 능력을 단정하는 잣대라기보다, 그동안 어떤 언어로 사고하고 학습해 왔는가의 결과로 읽는 편이 적절하다. 그렇다면 두 학생의 한글과 영어 독해력은 어떨까.
문해력을 확인하는 비교적 간단한 방법 가운데 하나는 글을 요약하게 하는 것이다.
A와 B에게 한글 설명문을 요약하게 하자, A는 자신의 말로 핵심 내용을 정리했다. 반면 B는 본문의 문장을 그대로 옮겨 적듯 나열했다. 영어 설명문에서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B는 한글이든 영어든, 글 전체의 의미를 파악하고 핵심을 자신의 언어로 재구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영어 독해력이 낮을 때 흔히 떠올리는 원인은 영어 어휘력이나 문법 지식의 부족이다. 그러나 A와 B의 경우, 이 설명은 맞지 않는다. 두 학생의 영어 어휘력과 문법 지식에는 큰 차이가 없고, 오히려 일상 영어 회화에서는 B가 A보다 능숙했다.
그렇다면 한글 독해 능력의 차이는 어휘력 때문일까. 한글 어휘력에서 A가 B를 앞서는 것은 사실이지만, 영어 독해에서 B가 어휘력 문제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어휘력 부족으로 한글 독해의 어려움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독해는 단어의 뜻을 아는 문제를 넘어선다. 문장의 의미를 파악하고, 문단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며, 드러나지 않은 의미를 추론하고, 글 전체를 종합하는 사고 활동이다. 따라서 글의 구조를 분석하고 의미를 통합하는 힘, 즉 문자 언어를 통해 사고하는 능력이 없다면 어휘력과 문법 지식만으로 적절한 설명문 독해에 도달하기 어렵다.
이 지점에서 Jim Cummins(캐나다 토론대학의 명예 교수이자 이중언어교육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전문가)의 이론이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그는 일상 언어 능력(BICS)과 학문 언어 능력(CALP)을 구분하며, 학문적 언어 능력은 언어 간에 전이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즉, 어느 한 언어에서 학문적 독해력을 안정적으로 갖춘 학생은 다른 언어에서도 유사한 수준의 독해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어느 언어로도 이 능력을 충분히 갖추지 못했다면, 다른 언어에서도 전이는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런 가정을 해 볼 수 있다.
영유아기부터 영어 몰입 환경에서 학문적 사고 능력을 충분히 기른다면, 영어를 통해 먼저 독해력을 확보한 뒤 그것을 한국어로 전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실제로 국제학교나 안정적인 이중언어 환경에서 영어로 학문 언어를 먼저 확립한 뒤 모국어로 전이하는 사례도 존재한다. 이 점에서 ‘모국어 선행 발달’을 절대적 원칙처럼 말하는 것은 분명 경계해야 한다. 다만 문제는 그 가능성이 모든 학생에게 열려 있느냐이다.
학문적 독해력은 단순한 노출만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충분한 읽기 경험, 체계적인 문어 사용 지도, 요약과 재구성 훈련, 그리고 이를 지지하는 가정과 학교 환경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 이러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 외국어 몰입만 이루어진다면, 어느 언어에서도 단단한 문해력을 갖추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사실, 앞서 소개한 A와 B는 공립 초등학교 입학 이후 서로 다른 나라에서 학교생활을 했다. A는 한국에서 성장했고, B는 영국의 공립 초등학교에서 3학년까지 다니다가 4학년 진급을 앞두고 귀국했다. B는 초등 1~3학년을 영어 몰입 환경에서 보낸 셈이다.
초등 저학년 시기는 문자 언어를 통해 사고하는 법을 본격적으로 배우는 시기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아동이 한국어 문해력을 충분히 확보하기 전에 영어 몰입 환경에 놓일 경우, 모국어와 외국어 어느 쪽에서도 학문적 독해력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A는 한국에서 성장하며 한국어 문해력을 비교적 충분히 확보했고, 그 과정에서 글을 통해 사고하는 힘을 기를 수 있었다. 이 힘은 이후 영어 설명문을 이해하는 데에도 작동한다. 그래서 일상 회화에서는 B가 앞서지만, 설명문 독해에서는 A가 앞서는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영어 독해력은 영어 어휘나 문법의 문제가 아니라, 문자 언어를 통해 사고하는 힘의 문제다. 그 힘이 어느 언어를 통해서든, 얼마나 안정적으로 길러졌는가가 핵심이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학생에게 외국어로서의 영어 교육을 통해 이 능력을 기르는 일은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모국어를 통해 기르는 일보다 더 쉽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 글에서 제시한 해석은 제한된 사례와 이론을 바탕으로 한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 영어 교육을 논의할 때 모국어 문해력의 역할을 보다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필요성만큼은 분명하다. 이 문제를 개인의 선택이나 경험에만 맡겨둘 것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체계적인 연구와 논의로 확장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