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중심성과 고정관념에서 물러서자
※ 지난주 글 끝부분에서 예고한 바와 다른 주제입니다. 설명문을 계속 다루다 보니 쓰는 제가 지겨워져 좀 돌아가려 합니다.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인문학 분야에서 ‘해석’은 ‘창작’이라는 말이 있다. 문학이나 철학 텍스트의 해석은 독자가 텍스트의 어떤 점들에 주목하고, 주목한 지점들을 어떻게 연결 짓고, 그 연결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꽤 다른 결과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의 특성을 극단화하고 느낌의 자유와 해석의 자유를 동일시하여 모든 해석(무엇보다 ‘나’의 해석)이 옳다는 주장이 있다. 반대로, 객관식 문제 풀이로 단련된 대한민국 독자의 뇌는 텍스트 해석에 단 하나의 ‘정답’이 있다고 전제하기도 한다.
그러나 두 입장 모두 해석 작업에서는 경계해야 할 태도이다. 전자는 상호적인 소통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후자는 일방적인 소통만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각자의 지식, 경험, 독해력이 구성해 내는 해석은 절대적 주관성과 객관성 사이에서 상호주관성을 확보하려 노력해야 한다. 이는 상호 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언어의 본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상호주관성은 현상학자 에드문트 후설이 제안한 개념이다. 이는 각자의 주관이 소통하고 조정되면서 서로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는 공통된 의미에 도달할 수 있는 성질을 뜻한다. 이 개념을 텍스트 해석에 적용하면, 누군가의 주관적 해석은 다른 해석 주체들이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는 의미에 도달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언어로 구성된 텍스트를 해석하면서 언어의 본질이라 할 만한 상호주관성을 간과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이 글은 그 원인을 크게 두 가지로 본다. 한 가지는 주관성의 늪이고, 다른 한 가지는 고정관념의 덫이다.
교육청에서 선발하고 운영하는 영재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초등학교 6학년 학생 A(지능 지수 132)가 있다. A 학생이 동화의 도입부인 다음 글을 읽었다. (‘/’ 표시 위치에서 원래 문단을 바꾸어야 한다. 지면을 아끼고자 ‘/’ 표시로 문단 바꾸기를 대신한다.)
나는 열세 살 때 내 얼굴을 처음 보았다. / 그날 나는 산에 있었다. 그리고 내 앞에는 아주 작은 웅덩이 하나가 있었다. 바위가 반쯤 땅에 묻혀 있어 마치 살이 찐 거인이 누워 있는 모습 같았고, 웅덩이는 거인의 배꼽처럼 보였다. 거인의 배꼽에 물이 고여 있는 셈이었다. / 내가 웅덩이 안을 들여다보자 그 안에 정말 못 생기고 볼품없는 남자아이가 나타났다. / “너는 양반은 아니구나.” /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 “네 얼굴은 그냥 봇짐장수에 딱 맞아.”
- 출처 : 『서찰을 전하는 아이』(한윤섭 지음, 푸른숲주니어 펴냄), 11~12쪽
위 인용문에 드러난 인물의 외적 특성은 사건 당시 열세 살이었다, 남자이다, 봇짐장수일 가능성이 있다, 양반이 아니다, 등이다. 인용문에는 내적 특성도 표현되어 있지만, 직접 서술되어 있지 않아 ‘해석’이 필요하다. 그런데 내적 특성의 해석을 위해서는 먼저, ‘나’가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볼 때 어떤 기분인지 해석해야 한다.
A는 이 순간 ‘나’가 ‘재밌다’고 느낀다고 해석했다. 그렇게 해석한 이유는 바위에 고인 물에 자기 얼굴이 나타나면 자기는 재밌을 것 같기 때문이라고 한다.
A는 책 읽기를 즐긴다. 그런데 동화나 소설을 읽을 때 인물의 상황과 감정에 빈번히 자신을 투사한다. A가 6~7세라면 자연스러운 해석 방식이다. 그러나 A가 초등학교 6학년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일반적 해석 방식은 아니다.
작품 속 인물의 감정은 우선, 인물의 입장에서 해석해야 한다. ‘나라면’이라는 가정법은 차후에 적용해야 한다. 그러나 A는 나이에 비해 타인 조망 능력이 미숙하다. 그러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작품 속 인물에게 자신을 투사하여 해석하곤 한다. “정말 못생기고 볼품없는 아이”라는 명확한 단서에도 불구하고, A는 자기 중심성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여 또다시 자신을 투사한 것이다.
우리는 어릴 때 ‘흥부와 놀부’ 이야기를 흔히 짧게 축약된 버전으로 접한다. 십여 분이면 다 듣거나 읽을 수 있는 분량이다. 그처럼 줄여 만든 이야기에서 흥부와 놀부의 성격은 단순하다. 흥부는 착하고, 놀부는 못 됐다. 그 이야기를 소개한 어른들도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흥부전’은 명색이 소설(판소리계 소설)이다. 고전 소설에서조차 주요 인물의 성격이 그처럼 단순한 경우는 좀처럼 없다. 다양한 사건들 속에서 펼쳐지는 인물의 말과 행동은 이런저런 성격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무엇에 대해서든, 어떤 고정관념에 빠진 채 글을 읽을 때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실수가 있다. 글에서 우리에게 준 정보들 가운데 나의 고정관념에 부합하지 않는 정보들을 알게 모르게 무시하는 것이다. 한 ‘흥부전’의 다음 구절들을 보자. (다음 인용문의 출처는 정종목이 쓰고, 창비에서 펴낸 『흥보전』이다.)
[가] 놀부가 흥부를 집에서 내쫓는 상황
- 놀보 : “네 놈은 밥만 먹고 나면 구렁이 돌 듯 밖으로만 나돌아 주막에 나가 외상술이나 퍼먹고 윷이나 놀며 다닌다며?” [14쪽]
- 흥보 : 제 신세는 그렇다 치고, 젊은 아내와 어린 자식은 뉘 집에 의지하며 무엇을 먹고 살라는 겁니까? [16쪽]
[나] 곡식을 빌리러 관가에 가는 흥보 모습
흥보가 의관을 차리는데, 차마 눈 뜨고는 못 볼 꼴이었다. 다 떨어진 헌 망건을 물렛줄로 얽어 쓰고 박 조각으로 관자를 달아 질끈 졸라맸다. 그 위에 철대 부러진 헌 갓을 쓰고 다 떨어진 고의적삼을 걸쳤다. 그런 다음 목만 남은 버선발에 한 손에는 담뱃대, 한 손에는 살만 남은 쥘부채를 들었다. 흥보는 그런 꼴에도 양반 행세를 하느라 휘적휘적 팔자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28쪽]
흥부는 선하다는 생각에 못 박인 우리의 사고는 또 다른 흥부의 특성을 해석하지 못한다. 이 작품에서 흥부가 선하다는 고정관념이 오류는 아니지만, 그 고정관념에 붙들린 채 글을 읽으면 흥부의 ‘성장’을 해석하지 못하게 된다.
인물의 입장을 헤아리기보다 나를 앞세우거나 텍스트가 건네는 단서들보다 내 머릿속의 고정관념을 우선할 때, 해석은 소통이 아니라 독백이 된다. 상호주관적 해석은 능력이라기보다 태도이다. 자기 중심성에서 한 걸음 물러나 텍스트가 제시한 정보들에 귀 기울이는 태도, 고정관념을 유보하여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가려는 태도, 이런 태도로 글과 만날 때 해석은 타인과 의미를 나누는 창작의 장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