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의 묵시록>,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1979) 리뷰
지옥의 묵시록 (1979)
감독: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출연: 마틴 쉰, 말론 브란도, 로버트 듀발 외
별점: 4/5
미군 공수부대 소속 윌러드 대위는 커츠 대령 암살 임무를 받는다. 철저한 기밀 속 금지구역인 캄보디아를 향해 험난한 여정을 떠난 그는 서로 죽고 죽이는 정글 같은 전쟁 상황에 점차 피폐해져 간다. 마침내 커츠 대령의 은신처에 도착한 윌러드 대위는 상상을 초월하는 충격적인 공포와 마주하게 되는데…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침략전쟁의 근원적 원인은 무엇인가. 권력다툼의 과잉이다. 그렇다면 과잉된 권력은 어떤 결과를 야기하는가. 영화는 그 출발지가 광기임을 극 초반부부터 드러낸다. <지옥의 묵시록>은 전쟁의 광기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지를 일직선의 강줄기를 따라가듯 몇 개의 에피소드로 나누어 묘사하는 작품이다. 그래서 그 끝에는? 광기의 종착지는 무엇일까. 코폴라는 광기는 곧 사회를 퇴행시키고 그 퇴행으로 인해 남게 되는 것은 거대한 '공포' 뿐임을 은유적으로 드러내며 영화를 마친다. 그야말로 직역된 영화의 원제(Apocalypse Now)처럼 지금 이 순간에 드리운 종말인 셈이다.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영화는 베트남에서 캄보디아를 가로지르는 '넝 강'이라는 가공의 강을 배경으로 한 로드무비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잇는 강은 실제로도 여럿 존재하고 그 강을 건너는 데에는 작중 묘사되는 것처럼 며칠의 시간이 소요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폴라가 가상의 강에 대한 설정까지 넣어 가며 며칠의 항해를 거쳐 베트남에서 캄보디아로 향하는 윌러드의 여정을 그려낸 데에는 물론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한 줄기로 이어진 강이라는 형식을 따라 일직선으로 전쟁의 광기가 그 종점으로 향하는 여정을 그리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영화는 탈영하여 캄보디아에 자신의 왕국을 차린 커츠 대령을 암살한다는 최종 임무를 향해 나아가면서 그 사이사이에 전쟁의 참상에 대한 메타포로 가득 찬 에피소드들을 차례로 삽입시켜둔다. 그 에피소드를 하나하나 열거해보도록 하자.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공중강습부대가 등장하는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부터 목적성을 잃고 폭력성만을 발현하려 드는 미군의 모습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킬고어 중령을 필두로 한 공군 부대는 살아남기 위해 참전한 베트콩들과는 달리 그저 재미를 위해 공습을 감행하고 심지어는 해안에서 서핑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정글 속에 숨어있는 베트콩을 폭격으로 섬멸시켜 버린다. 그들의 이러한 태도와는 별개로 미군은 베트남 민간인들을 상대로 "우리는 자유를 위해 이곳에 왔다."라거나 "여러분을 해치지 않는다."와 같은 선전을 해대는 모습을 보면서 관객들은 어렴풋이 가지고 있던 전쟁의 광기를 확실하게 머릿속에 각인하게 된다.
강습부대를 지나 강을 건너면서 미군 주둔지에 도착한 윌러드와 일행은 쇼걸을 위시한 대규모의 위문공연을 마주한다. 사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여성을 위문 수단으로 쓴다는 발상 자체가 문제적으로 비칠 수 있으나 이 영화가 70년대 영화임을 감안하여 우선 그 점은 뒤로 해 두자. 위문공연의 떠들썩했던 열기가 사라지고 난 주둔지에는 다시금 우울과 정적만이 감돌뿐이다. 자유의 수호라는 명분 뒤에서 권력싸움만을 일삼는 국가가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한 수단으로 준비한 이 공연은 병사들에게는 아주 잠시간의 싸구려 아편 같은 역할을 할 뿐이다.
세 번째 큰 에피소드로 넘어가기 전에 윌러드에 대한 작은 일화가 하나 제시된다. 민간 베트남인이 타고 있던 보트의 검문과 그 과정에서 벌어진 민간인을 향한 발포가 그것이다. 임무 중이니 검문 대신 빠르게 이동이나 하자던 윌러드의 말을 거부한 대원은 해당 보트에 탄 인물들을 적으로 간주할만한 정황이 없음에도 검문을 지속하다가 오인사격을 해버리고 만다. 이 과정에서 다친 베트남인 여성을 병원으로 데려다줘야 한다는 대원들의 말에 윌러드는 그를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안락사한다. "그러게 내가 검문하지 말랬잖아."라는 조금의 감정도 보이지 않는 말투로.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장면이지만 이 짧은 시퀀스 속에 권력과 전쟁의 광기에 점점 집어삼켜져 가는 윌러드의 심리가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 초반 "파병 당시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만을 꿈꿨지만 집에 돌아온 이후에는 다시 베트남에 오는 것만을 꿈꿨다."는 맥락의 윌러드의 말처럼, 그는 권력자들 간의 다툼의 결과로 벌어진 전쟁 속에서 안식처를 잃어버린 방랑자다. 그런 그가 광기에 휩싸여가는 과정이 이 영화의 주된 플롯이기도 하고 말이다.
다시 윌러드의 여정을 따라가 보도록 하자. 늦은 밤에 도착한 '두 렁 다리'라는 전선에서, 그들은 탈영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명령을 내릴 컨트롤타워조차 부재한 아비규환의 상태에 놓인 미군을 발견한다. 이들은 광기에 휩싸이다 못해 싸움의 목적이나 자신들이 이곳에 있는 이유조차 잊어버린 것으로 묘사된다. 사실 그렇다. 첫 번째 강습부대의 전투에서도 은연중에 드러났듯이, 미군의 베트남전 개입에는 냉전 시대 소련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아집 외에는 어떤 이유도 없었다. 영화는 그런 아집의 결과로 자국의 젊은이들이 어떤 상태에 놓였는지를 성찰할 것을 이 챕터를 통해 전달한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 이번에 윌러드 일행이 도달한 곳은 베트남 독립 전부터 지주였던 프랑스인 자경단이 지키고 있는 농장이다. 그들은 베트남이 자신들의 고향이라며 프랑스인들의 치하에 베트남이 있던 시절에는 모두가 행복했음을 논한다. 자신들은 2차 대전 내내 패전만을 기록했으니 이번 전쟁에서라도 기필코 승리해야 한다며 말이다. 그러나 이는 미국이 자유를 위해 베트남에 개입했다는 선언만큼이나 무책임하고 무의미한 발언일 뿐이다. 사실 이 에피소드는 이러한 지점 외에도 영화적 의미를 가지는데, 이후 제시될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드러날 본격적 '퇴행'이라는 문제의식에 앞서 복선을 깔아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렇게 우리는 식민 통치 당시 베트남을 점령한 프랑스인들의 심리에 대해 잠시 환기한 후 본격적으로 영화의 주제의식이 전달되는 마지막 에피소드로 넘어가게 된다.
드디어 캄보디아에 도착한 윌러드가 본 것은 베트남 원주민, 남베트남인, 심지어는 미국인까지 어우러져 커츠 대령을 신으로 떠받드는 괴이한 광경이었다. 이는 광기를 이기지 못해 이전의 사회 구성 방식으로 회귀해버린 퇴행의 현장이다. 앞서 제시된 프랑스 농장이 베트남의 근대를 나타냈다면 이번 에피소드의 모습은 그보다도 이전의 전근대, 신적 권위를 앞세운 종교 지도자가 통치하는 베트남의 과거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곳에서 포로로 잡혀 고생을 하던 윌러드는 결국 빠져나와 소 잡는 칼로 커츠 대령을 암살하는 데 성공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 암살 장면이 야밤의 광적인 축제 속에서 소를 잡는 원주민들의 종교의식과 겹쳐져 연출된다는 것이다. 이는 어찌 보면 광기에 휩싸여 퇴행한 커츠 대령이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윌러드에게 맡긴 제의처럼 보이기도 한다.
죽어가는 와중에 커츠 대령은 짤막한 유언을 남긴다. "공포다, 공포."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대사이기도 한 이 마지막 대사는 권력으로 인한 전쟁, 그리고 그것이 야기한 광기의 말로를 설명한다. 광기는 끝내 불안과 공포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쯤에서 중요해지는 것이 하나 있다. 윌러드의 임무는 과연 성공한 것인가? 물론 임무대로 그는 커츠를 암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것이 작전 수행이라는 시스템적 측면에서의 것이었는지 아니면 앞 문단에 나온 것처럼 커츠를 위한 하나의 제의였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할 여지가 남아있다. 후자의 대표적 논거가 커츠를 살해한 후 신전을 내려오는 윌러드를 향해 모두가 절을 하는 광경이다. 그곳의 사람들은 마치 새로운 자신들의 지도자를 목도한 것처럼 윌러드를 경배하려 든다.
영화는 배를 타고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윌러드의 모습을 비추며, 또 커츠가 유언으로 남긴 "공포다, 공포"라는 말을 되뇌며 마무리된다. 이미 엎질러진 물처럼, 이들에게 드리운 광기와 퇴행, 그리고 공포는 다시 주워 담아질 수 없을 것이다. 코폴라는 이처럼 고통받는 모든 이들에게 한 줌의 희망조차 제시하지 않은 채 씁쓸한 비관론으로 영화를 마무리한다. 우리는 그저 기대해야 할 뿐이다. 다시는 이런 '종말'이 우리를 찾아오지 않기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