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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년의 영화 Oct 14. 2022

부조리의 시대에도 희망은 존재한다

<라쇼몽>, 구로사와 아키라(1950) 리뷰

라쇼몽 (1950)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

출연: 미후네 토시로,  마치코, 모리 마사유키 

별점: Not Rated

(1970 이전 영화는 별점을 매기지 않습니다.)


전란이 난무하는 헤이안 시대, 억수 같은 폭우가 쏟아지는 나생문의 처마 밑에서 나무꾼과 스님이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다. 잠시 비를 피하러 그곳에 들른  남자가 그들의 사정을 궁금해한다. 나무꾼과 스님은 남자를 상대로 최근에  마을에 있었던 기묘한 사건을 들려준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고전적 세계관의 일본에서 인식하는 인간의 덕목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단순할 것이다. 그들은 사무라이에게는 의리와 충심을 바랐을 것이고, 도적에게는 용기와 야망을 바랐을 것이며, 여인에게는 순종과 정조를 바랐을 것이다. 모더니티의 끝자락에서 세계에 공개되어 베니스 영화제를 휩쓸었던 이번 리뷰작 <라쇼몽> 그런 고전적 사조와의 단절을 말하는, 지극히 일본적이면서도 서구적인 작품이다. 영화는 고전적 가치가 붕괴되는 20세기 중반 일본이라는 시공간적 특성을 천여   헤이안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편의 우화처럼 직조해낸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관점에서 세계는 각자 상충되는 등장인물들의 주장처럼 점차 믿을  없는 곳이 되어 가고 이전의 가치들은  이상 아무 쓸모없는 허망한 선언처럼  늘어질 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곳에는 여전히 희망이 존재한다. 작중 나무꾼과 승려는 각자 인간은 이기적일 뿐이라는 주장과 인간에게는 선의가 존재한다는 주장을 하며 싸우지만 사실  명제는 상충되지 않는 탓이다. 인간은 이기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의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영화가 끝끝내 주장하고자 하는 바일 것이다. 마치 (사무라이) (도적), (여인)이라는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가 급변하는 정세와 인간의 이기심 속에서 모조리 무너지고 있지만 그러한 고전적 가치의 붕괴가 근대성이라는 신테제로의 전환을 야기하는 아이러니처럼 말이다.

영화의 -중반부를 구성하고 있는 도적, 여인, 사무라이라는  인물의 증언은 각자 기존의 일본 세계관에서 논하는 각각의 인물들이 가져야  덕목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번째 증언자인 도적은 범죄자로서 악행을 저지른 인물이지만 여인의 당돌한 모습에 오히려 황홀해하거나 자신이 살해했다고 주장하는 사무라이의 기개에 대해 높이 평가한다. 이는 자신이 그간 저지른 수많은 악행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용기와 야망을 가득 품고 있는 인물로 자신을 묘사한 것이라   있다.  번째 증언자인 여인은 도적에게 순결을 잃었다는 것에 자책하지만 그보다도 남편인 사무라이가 자신을 증오 어린 눈빛으로 본다는 사실에 더욱 충격을 받아 남편을 스스로 살해했음을 주장한다. 이는  남자에게 순종하고 정조를 지키려 했으나  바람이 깨지고 남편에게까지 혐오당하자 자신의 덕목이 완전히 부정당했다는 사실에 이성을 잃었다고 논하여 자신이  덕목을 그토록 소중히 여겼음을 밝히는 것이라   있다.  번째 증언자인 사무라이(무당의 몸을 빌려 말한다.) 도적에게 범해진 이후 그의 간계에 넘어간 아내에게 염증을 느끼나 남편을 죽여달라 부탁하는 아내에게 화가   여인을 어떻게 할지 물어보는 도적의 모습에 그를 마음속으로 용서하고 자결했노라 주장한다. 이는 자신에게 죄를 지은 자라 하더라도 용서하고 자신의 책임이 없음에도 자결을 통해 모든 것을 책임지려 하는 의리와 충심을 주장한 것이라   있다.

이들의 증언과 논변은 각자의 주장이 지극히도 다르다는 점에서도 특기할만하지만 그보다도 모두가 사건의 책임 소재로 자신을 지목한다는 점에서 징후적이다. 말하자면 이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덕목을 지키기 위해 희생된 일종의 파괴적 순교자가 되고자 한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무엇 하나 믿을 수가 없다. 이런 수수께끼 같은 미궁 속의 증언들은 거짓으로 넘실거리고 이기주의로 가득한 근대 사회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한 부조리는 이윽고 밝혀지는 진실인 나무꾼의 증언에서 극대화된다. 기실  사람의 증언  진실은  무엇 하나 존재하지 않았으며 사무라이가 죽은 바로  장소에는 고전적 덕목이란 것이 모조리 파괴된 혼돈만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토록 황망하게도 밝혀진 진실 속에는 자신의 악행을 인정하면서도 사무라이의 칼을 받아내던 도적의 용맹함도, 정조를 잃은 것도 모자라 남편의 증오를 뒤집어쓰는 것에 이성을 잃었던 여인의 순종도, 아내의 불의와 도적의 의리에 감화되어 스스로를 희생했던 사무라이의 충심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도적은 비굴하게 여인을 설득하고 사무라이는 의리 따위 저버리고 자신을 향한 싸움을 거부하며, 여인은 그런 남성들을 비웃으며 상황 전체를 조롱할 따름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어이없고도 황당한 이유로 지난하고도 눈꼴시려운 싸움이 벌어진다. 모든 것의 전말은 그저  졸전 속에서 아무런 필연조차 없이 우연히 거둔 승리의 대상이 도적이었을 뿐이었다는 절정에 다다른 부조리뿐이다. 인간의 이기심과 선의에 대한  화자 나무꾼과 승려의 논쟁은 이로써 전자의 승리로 일축될 듯했다.

그러나 모든 상황이 뒤바뀌며 희망이 전해지는 결말부의 연출이 압권이다. 나무꾼이 몰래 훔친 여인의 단도를 지적하며 버려진 아이의 비단옷을 훔쳐 달아난 청자 사내의 이야기로 영화가 마무리될까 하는 찰나, 그 버려진 아이를 스스로 거두려는 나무꾼의 선의를 통해 구로사와는 이 변화 많은 세계에 실낱 같은 희망을 전한다. 이제는 승려조차도 나무꾼의 선의를 의심하려던 순간, 그야말로 기적처럼 전해진 희망이다. 그러나 사실 이 희망은 우연히 다가온 것이 아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인간의 이기심과 선의는 상충되는 개념이 아닌 탓이다. 고전적 덕목이 파괴되고 치졸한 현실만이 남은 진실은 어찌 보면 여성의 무조건적 순종이나 도적의 용맹을 가장한 객기, 사무라이의 의리라는 명목의 합리화와 같은 전근대적 풍습의 타파라는 맥락에서 긍정적으로도 바라볼 수 있다. 각자의 이기심만이 존재하던 이다지도 야비했던 현실이 아이러니하게도 모더니티를 받아들이는 과도기로서의 역사가 되어 새로운 방식의 선의를 세계에 존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라쇼몽>은 지극히 일본적이면서도 동시에 서구적 요소가 삽입되는 영화가 된다.

영화는 아이를 안고 걸어가는 나무꾼의 옅은 미소를 비추며 마무리된다. 역사는 희극과 비극으로   반복된다는 서구의 격언처럼 우리는  영화 속에서 비극으로서의 근대화의 과도기와 희극으로서의 그것을   목격하였다. 일본 전후 사회의 근대화에 대한 맥락을 헤이안 시대에 대한 우화로서 풀어낸 구로사와 아키라의 연출력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상의 맥락에서, 비로소 <라쇼몽> 비로소 20세기 최고의 시대극이자 부조리극으로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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