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르: 러브 앤 썬더>, 타이카 와이티티 (2022) 단평
토르: 러브 앤 썬더
감독: 타이카 와이티티
출연: 크리스 햄스워스, 나탈리 포트먼, 테사 톰슨, 크리스찬 베일 외
별점: 2.5/5
이너 피스를 위해 자아 찾기 여정을 떠난 천둥의 신 ‘토르’ 그러나, 우주의 모든 신들을 몰살하려는 신 도살자 ‘고르’의 등장으로 ‘토르’의 안식년 계획은 산산조각 나버린다. ‘토르’는 새로운 위협에 맞서기 위해, ‘킹 발키리’, ‘코르그’, 그리고 전 여자친구 ‘제인’과 재회하게 되는데, 그녀가 묠니르를 휘두르는 ‘마이티 토르’가 되어 나타나 모두를 놀라게 한다. 이제, 팀 토르는 ‘고르’의 복수에 얽힌 미스터리를 밝히고 더 큰 전쟁을 막기 위한 전 우주적 스케일의 모험을 시작하는데...
단평은 스포일러를 포함하지 않습니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세워질 수는 없지만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는 있나 보다. 11년에 걸쳐 직조된 21세기적 신화는 그렇게 3년 만에 '동화'로 전락했다. <토르: 러브 앤 썬더>는 이전까지의 MCU 세계가 받아들인 적도 없던 고전적 신화성을 무맥락적으로 소환한 뒤, 또 무의미하게 폐기시킨다. 그 결과 신화와 현실의 대립을 예고하는 그 비장한 순간에도 남겨지는 것은 의아함 뿐이다. 케빈 파이기는 이제 감독의 의사를 존중하여 개별 작품마다 고유한 개성을 입힌다는 전략이 적어도 마블 스튜디오에는 유효하지 않았음을 받아들여야 할 듯하다.
<어벤져스: 엔드게임>과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으로 인피니티 스톤을 중심으로 한 대단원의 막을 내린 마블 스튜디오는 그 후 3년간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어 왔다. <블랙 위도우>,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이터널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을 거쳐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에 이르기까지 다섯 편의 페이즈 4 영화는 스파이더맨을 제외한다면 실패작에 가까웠다. <이터널스>와 <닥터 스트레인지>의 비평적 실패가 유독 뼈아팠다. 전자는 이전까지 마블 스튜디오가 지향하던 현실과 맞닿은 신화라는 개념을 갑작스럽게 도입한 초월성이라는 가치로 대체하려 시도하다가 세계의 일관성을 잃었고 후자는 샘 레이미 감독 특유의 장르 영화적 스타일을 MCU라는 세계 속에 무리하게 도입하려다가 핍진성과 윤리성을 모두 잃었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해석은 필자가 이전에 게시한 두 영화의 단평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그렇다면 이번에 개봉한 <토르: 러브 앤 썬더>는 어떨까? 불행하게도 이번 작품은 위 두 작품이 겪은 실패의 방향을 양쪽 모두 답습해낸 결과물에 가깝다. 영화는 닥터 스트레인지의 사례처럼 타이카 와이티티의 스타일을 과하게 녹여내려다가 마치 길 잃고 방황하는 듯한 서사를 만들어냈고 이터널스의 사례처럼 갑작스럽게 등장시킨 방대하고 초월적인 개념으로 기존의 철학을 대체하려다가 기존의 것도, 새것도 제대로 잡지 못했다. 결국 페이즈 4로 넘어온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영화는 이번에도 고전을 면치 못한 셈이다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아무래도 유니버스의 구성에 있어 케빈 파이기라는 한 인물이 미치던 영향력과 관계있을 것이다. 페이즈 1에서 페이즈 3까지의 MCU 영화들은 그의 통솔 아래에서 적어도 느슨할지언정 일관된 철학과 마스터플랜을 가지고 나아갔다. 한 편의 영화가 다음 영화와 느슨하게 연결되고, 각각의 연결고리가 얽히고설켜 결국 어벤져스라는 메인이벤트로 넘어가는 식이었다. 이런 구성은 비록 시리즈 전체의 완성도를 위해 개별 영화의 완성도를 일정 부분 포기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유효하여 MCU를 영화 사상 가장 성공한 프랜차이즈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그러나 페이즈 4부터는 다르다. 영화 속에서 케빈 파이기의 영향력은 줄어들었고 오히려 개별 영화의 연출자, 감독의 영향력은 증가했다. 대표적인 게 이터널스의 클로이 자오와 닥터 스트레인지의 샘 레이미, 그리고 이번 토르의 타이카 와이티티다. 클로이 자오는 이전부터 자신의 영화 세계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던 신비함과 초월에 대한 개념을 적극적으로 자신의 연출에 녹여냈고, 샘 레이미는 호러와 슬래셔 무비라는 자신의 장기를 영화 속에 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는 이번 <토르: 러브 앤 썬더>를 맡은 타이카 와이티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그는 록 음악과 B급 정서를 중심으로 한 자신의 감성을 유감없이, 심지어는 그의 전작인 <토르: 라그나로크> 때보다도 더욱 적극적으로 드러냈다.
그래서 그 결과는? 단언컨대 좋지 않다. 이는 전적으로 감독들이 자신의 장기를 스스로 연출하는 개별 영화 한 편만을 위하여 사용하고 그 누구도 시리즈 전체를 통솔하는 마스터플랜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데서 생긴 문제다. 인피니티 사가를 통틀어 영화와 드라마 시리즈 전체를 느슨하게나마 묶어주던 MCU의 일관된 철학은 페이즈 4 이후로 자취를 감추었다. 파이기는 그 자리를 개별 감독들의 개성으로 대체하려 한 듯하지만 그것은 마치 '현실적이던' MCU 세계 속에 뜬금없이 끌어들여진 '초월성(이터널스)' 혹은 '고전적 신화성(토르: 러브 앤 썬더)' 개념처럼 관객에게는 혼란을, 평단에게는 의아함만을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선에서 영화 내용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만 꺼내보자면, <토르: 러브 앤 썬더>는 이전까지 마블 스튜디오가 구상했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고전적 신화성'이라는 개념을 영화의 전면에 끌고 온다. 이번 영화의 메인 빌런인 고르 갓 부처(신 학살자)라는 캐릭터로부터 추론되는 것처럼, 신들에 관한 이야기가 영화 플롯의 중심에 서는 것이다.
그러나 토르라는 '천둥의 신' 캐릭터가 이미 페이즈 1에서부터 존재했음에도 이들 신들의 신성이나 완전성 같은 개념은 MCU 내에서는 이전까지 단 한 차례도 받아들여졌던 바 없었다. 당장 오딘이나 토르, 로키 등의 신들만 보더라도 그들은 고도로 발달한 행성의, 매우 긴 수명과 현생 인류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힘을 가진 외계인으로 설정되었던 탓이다. 그런데 타이카 와이티티는 뜬금없이 제우스나 헤라클레스 따위의 고전적 신화성을 자신의 영화에 떡하니 소환해 와서는 그것을 또 (마치 그게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적폐라도 된다는 듯이) 선언적으로 폐기해버린다. 그 과정에서 마블 스튜디오가 11년에 걸쳐 구축했던 (아이러니하게도 '신'이 등장하지 않는) '21세기적 신화'는 동시에 폐기되고, 지극히 디즈니적인 동화로 대체당한다. 그러니 신화와 현실을 대립시키는 그토록 비장한 구도 속에서도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알 수 없는 기시감만을 느끼게 되고 마는 것이다.
이 디즈니적 동화를 통해 마블 스튜디오가 전달하려는 의도는 명확하다. 어느덧 성인들의 전유물이 되어 버린 슈퍼히어로 무비를 다시금 아이들도 배제되지 않는 이야기로 되돌려놓겠다는 것. 그러나 그런 재전복의 과정에서 어떠한 논리적 정당화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꽤나 문제적이다. 영화는 이런 문제를 제기할 틈조차 없이 숏과 숏마다 달라지는 주제와 소재를 안고 위태롭게 달려 나간다.
실제로 이 지점 이외에도 영화는 많은 부분을 은연중에 그냥 퉁치고 넘어간다. 특히 신화성의 폐기 등과 같은 굵직한 주제의식을 던지면서도 정작 영화의 주제는 돌고 돌아 사랑 타령으로 끝난다는 점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오락가락하는 영화의 톤 변화는 이전 시리즈인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에서도 지적되었던 대목인데, 필자는 어쩌면 마블 스튜디오가 감독의 개성은 존중하되 이야기의 흐름은 단속하여 개성과 플롯 사이의 괴리가 생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토르: 러브 앤 썬더>는 제작자의 통찰 없이 감독 개개인의 개성만을 존중하겠다는 마블 스튜디오의 패착과 영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이 영화를 아이들에게 돌려주자는 텅 빈 구호만을 설파하려던 디즈니의 패착이 섞인 결과물이다. 그 현장에서 타이카 와이티티와 같은 재능 있고 좋은 이야기를 만들 줄 알던 감독은 희생되고 말았다. 그들이 간과한 것은 간단하다. 프랜차이즈의 성공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일관성이자 올바른 당위성이라는 것. 영화는 현실과 신화, 유한과 초월 등의 대비되는 개념을 설득력 있게 대체하지 못해 매너리즘에 빠졌고 영화의 톤을 갑작스럽게 변경할 당위 역시 설명하지 못해 방황하고 있다. 이 사실을 온전히 깨닫지 못한다면 그들이 예전의 활기를 되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