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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년의 영화 Oct 24. 2022

광기는 간데없고 대혼돈만 나부끼는 오합지졸 멀티버스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마블 스튜디오 (2022) 단평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2022)

감독: 샘 레이미

제작: 케빈 파이기

출연: 베네딕트 컴버배치, 엘리자베스 올슨, 베네딕트 웡, 레이첼 맥아담스, 소치틀 고메즈 외

별점: 2.5/5

끝없이 균열되는 차원과 뒤엉킨 시공간의 멀티버스가 열리며 오랜 동료들, 그리고 차원을 넘어 들어온 새로운 존재들을 맞닥뜨리게 된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 속, 그는 예상치 못한 극한의 적과 맞서 싸워야만 하는데….


단평은 스포일러를 포함하지 않습니다.

외화 제목을 번역할 때 징크스처럼 떠도는 말이 있다. "영화는 제목 따라가니까 멋대로 바꾸지 마라." 딱 이번 작품을 두고 할 수 있는 말이겠다. 호러 연출에 일가견이 있는 샘 레이미가 연출을 맡아 화제가 되었고 스트레인지와 스칼렛 위치, 그 외 멀티버스에서 넘어온 수많은 캐릭터들의 조합으로 기대를 모았던 닥터 스트레인지의 속편은 근본 없이 번역된 한국어 제목처럼 그렇게 관객들에게 '대혼돈'만을 안겨주었다. 샘 레이미적 기괴한 연출이 가져다줄 것이라 기대했던 광기스러움은 쓸모없는 겉치레에 불과해졌고 러닝타임이 지날수록 영화는 루즈해졌으며 급격한 마무리와 성장 서사는 영화의 주제의식을 고려하더라도 설득력이 없었다.

페이즈 3가 마무리되고 멀티버스와 우주적 존재가 시리즈의 핵심 주제로 재설정된 페이즈 4에서 마블 스튜디오는 케빈 파이기가 모든 것을 통제하던 기존의 체제에서 탈피해 감독의 스타일을 최대한 존중하고 독립적인 권한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전환을 시도하고자 하는 듯하다. 그러나 <블랙 위도우>와 <이터널스>의 비평적 실패를 포함해 페이즈 4에서 개봉한 다섯 편의 영화 시리즈 중 확실히 성공한 작품이라 할 만한 것이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밖에 없다는 사실은 그런 변화가 프랜차이즈에 성공적으로 안착하지 못했다는 근거가 되기에 충분해 보인다. 간단하게 비유해보자. 대중들이 대규모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에서 원하는 것은 셰프의 스타일이 살아있는 개성 강한 요리가 아니라 어디서든 일정 수준 이상을 보장하는 안정적인 요리일 것이다. 샘 레이미의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그런 점에서 철저히 실패했다. 그는 자신의 스타일에 집착한 나머지 살을 내주고 뼈를 취했으며 그 선택의 결과는 끝내 한 편의 영화의 완성도를 넘어서 향후 MCU의 방향성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우려스러웠다.

영화는 멀티버스 속 각각의 세계들에 혼재되어 있는 공통점과 차이점들만큼이나 혼란스럽게 달려 나간다. 어떤 수십 개의 세계를 통과하고 그중 몇 개의 세계에서 주요 사건을 겪으면서 스트레인지는 단순히 하나의 우주를 넘어 '우주들'의 위기를 해결해야 한다는 문제에 봉착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다른 우주의 히어로들과 조우하고 심지어는 다른 우주의 자신과 대면하기도 한다. 이는 충분히 마블 스튜디오의 능력으로 흥미롭게 풀어나갈 수 있는 수준의 플롯이다. 다른 우주의 히어로를 대면한다는 맥락에서 이전 작품인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이 성공적으로 이끌어냈던 추억의 자극이라는 요소를 끌어올 여지도 충분했다. 그러나 이 모든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기존의 MCU 세계관은 물론이고 스스로의 플롯에도 조화롭게 녹아들지 못한다. 이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지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지나치게 오락가락하고 일관적이지 못한 연출적 톤이 첫째이며, 기껏 흥미를 자극하기 위해 불러들인 다른 세계의 히어로들을 샘 레이미의 기괴한 스타일을 부각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사용했다는 것이 둘째 이유가 되겠다.(이에 대해서는 스포일러의 여지가 있으므로 자세히 다루지 않겠다.)

첫 번째 지점의 경우 우리는 이 영화가 왜 이토록 비일관적인 톤의 변화를 겪는지 그 자세한 내막을 알 수는 없다. 감독과 제작진의 마찰 과정에서 원활한 의견 조율이 거쳐지지 못한 채 영화가 세상에 공개된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더 많은 것을 보여주기 위한 지속적 재촬영의 과욕이 부른 참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 영화의 프로덕션은 이전까지 내러티브에 문제가 있었을지언정 프랜차이즈 영화로서 최소한의 일관성 정도는 갖추고 있었던 기존 MCU 영화들과는 완전히 결을 달리할 정도로 조악하다는 것이다. 한 영화 속에서 이 정도의 톤 변화가 있었던 사례는 잭 스나이더와 조스 웨던이 각각 완전히 다른 방법론으로 촬영에 임했던 분량을 한 편의 영화에 억지로 욱여넣었던 <저스티스 리그>(극장판) 정도 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위의 사실 이상으로 MCU의 행보에 우려가 가해지는 지점은 두 번째이다. 어쩌면 이 두 번째 지점이 이 영화가 선보인 진정한 '광기'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지난해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을 크게 호평하며 그것을 "히어로 영화 사상 가장 윤리적인 플롯"이라 논한 바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오리지널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감독이기도 했던 샘 레이미는 자신의 연출적 역량을 드러내기 위해 마블 코믹스가 수십 년에 걸쳐 키워온 캐릭터들을 그토록 비윤리적인 방식으로 이용하고 말았다. 연출자가 자신의 장기를 강조하기 위해 별다른 이유 없이 캐릭터들을 이용하는 것만큼이나 작품에 있어 비윤리적인 선택은 없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관객들이 기대했던 세계관의 질적 확장은 그토록 허망하게 으스러지고 영화 속에 남는 것은 (그마저도 비윤리적인) 추억 속 과거 설정들의 양적 변주뿐이다.

또한 작품의 주제의식을 드러내기 위한 후반부의 갈등 해소 역시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영화는 "가장 '효율적인' 선택이 과연 히어로에게 있어 가장 '옳은' 선택일 수 있는가" 하는 주제를 안고 내달리는데 역설적이게도 윗 문단에서 언급한 플롯의 비윤리성 탓에 우리는 심지어 이 모든 성장 드라마 자체가 위선에 불과하지 않나 하는 삐딱한 생각까지 하게 된다. 더군다나 그런 주제의식을 빌드업하는 과정조차 샘 레이미의 스타일을 부각하는데 대부분을 소비해버린 러닝타임 탓에 거의 생략되기에 이들의 성장은 쉽사리 공감하기조차 어려운, 소위 말하는 '급전개'가 되어 버리고 만다.

아는 이들은 이미 아시다시피, 필자는 영화의 완성도를 평가하는 기준이 있다면 스타일, 내러티브, 애티튜드일 것이라 믿는다. 이 잣대로 볼 때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는 샘 레이미가 나름대로 자신의 스타일을 공고히 하고자 노력했던 작품이며, 실제로 그 노력은 빛을 발하여 몇몇 장면에서 샘 레이미의 장점이 돋보이는 번뜩이는 장면을 연출해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끝내 프랜차이즈의 서사와 융화되는 데에도, 또 영화를 대하는 진지한 태도를 보여주는 데에도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이 영화는 페이즈 3 이후 마블이 내놓은 최악의 작품 자리는 간신히 면할지 모르나 스튜디오의 입장에서도 샘 레이미의 입장에서도 십수 년이 지나도록 뼈아픈 상처로 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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