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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년의 영화 Nov 02. 2022

21세기 보수주의자의 품격

<그랜 토리노>, 클린트 이스트우드 (2008)

그랜 토리노 (2008)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

출연: 클린트 이스트우드, 크리스토퍼 칼리,  , 아니  

별점: 4/5


자동차 공장에서 은퇴한 월트 코왈스키의 일상은 집을 수리하고 맥주를 마시고 매 달 이발하러 가는 것이 전부다. 전쟁의 상처에 괴로워하고 M-1 소총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남편이 참회하길 바란다는 아내의 유언을 이뤄주려고 자코비치 신부가 하루가 멀게 그를 찾아오지만 월트에게 그는 그저 ‘가방 끈 긴 27살 숫총각’일 뿐. 그는 참회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며 버틴다. 그가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을 만큼 믿는 존재는 곁에 있는 애견 데이지뿐이다. 이웃이라 여기던 이들은 모두 이사 가거나 죽고 지금은 몽족(Hmong) 이민자들이 옆집에 살고 있다. 월트는 늘어진 지붕, 깎지 않은 잔디 등 눈에 보이는 그들의 모든 것을 못마땅해한다. 동네 몽족, 라틴, 흑인계 갱단은 툭하면 세력 다툼을 하고 장성한 자식들은 낯설고 여전히 철이 없다. 낙이 없는 월트는 죽는 날만을 기다린다. 어느 날 이웃집 소년 타오가 갱단의 협박으로 월트의 72년식 ‘그랜 토리노’를 훔치려 하자 차를 훔치지 못하게 하고 갱단의 싸움을 무마시킨 월트는 본의 아니게 타오의 엄마와 누나 수의 영웅이 된다. 잘못을 보상해야 한다며 월트의 일을 돕게 된 타오. 엮이고 싶지 않았던 월트는 시간이 가면서 뜻하지 않은 우정을 나눈다. 타오 가족의 친절 속에서 월트는 그들을 이해하며 자기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가혹한 과거에서 떠나온 그들과 자신이 닮아 있다는 것을 깨닫고 차고 속에 모셔두기만 했던 자신의 자동차 그랜 토리노처럼 전쟁 이후 닫아둔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할리우드 영화계에도 보수적인 감독은 많으나 클린트 이스트우드만큼 '미국적인 '이라는 가치의 구현을 고집하는 감독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가 논하는 미국은 무한한 자유를 보장받는 공간이며  그에 걸맞는 무한한 책임을 져야 하는 공간이다. 그런 그가 다른 미국의 보수주의자들과 궤를 달리하는 점은 단지 자유로운 미국의 강인한 면모를 드러내는 것만이 미국을 위한 일이라 보지 않으며, 오히려  자유로운 미국이라는 공간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다른 가치들, 예컨대 평화나 인권, 인종 같은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인다는  있다. 실제로 그는  명의 리버테리언으로서 자유의 수호를 위해 필요한 모든 가치를 보호하려고 노력하며 그것을 자신의 영화에서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특히나 이번 영화 <그랜 토리노> 그렇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적의 기억이 자부심이자 트라우마로 동시에 작용하고 때로 다분히 인종주의적이고 구시대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하던 노인 월트가 옆집 이웃인 중국계 부족 몽족 가족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성장한다는 내용의  영화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자기반성적인 면모가 들어간 일기장이자, 앞으로 이어질 자신의 삶에 드러내는 다짐과도 같다. 자신은 과거의 사람이고 이미 많이도 변한 지금의 공간을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그럼에도  자유로운 공간에서 자유를 침해받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리라는 다짐 말이다. 이토록 진중하고 품격 있는 보수주의자를  누가 쉽사리 비난할  있겠는가.


영화는 꼰대라고 불려도  말이 없을 정도인 월트의 구시대적이고 다소 차별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아내의 장례식에 정숙하지 못한 옷차림으로  손녀를 노려보고 지하실에는 여전히 과거의 산물인 전쟁 시절의 추억들이 가득하며 인종차별적인 발언들을 숱하게 하는, 전형적인 보수적이고 퉁명스러운 미국의 노인네 같은 면모 말이다. 젊을  미국의 상징과도 같은 포드에서 일했으며 전쟁영웅으로 훈장도  차례 받았던 그에게 일본제 차를 타고 다니는 아들이나 스물일곱밖에  먹고 자신을 가르치려 드는 성당의 신부 자노비치, 주위의 인정머리 없는 이웃들, 특히나 옆집에 사는 몽족 이웃들은 눈엣가시일 뿐이다. 심지어 월트는 부족 축제를 진행 중인 이웃들을 향해 "야만인들"이라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로  몽족 가족의 소년 타오가 사촌 형이 속한 몽족 갱단의 위협에  이겨 월트가 아끼는 차인 '그랜 토리노' 훔치려다가 발각되면서 모든 것이 달라진다. 월트는 옆집을 어슬렁거리며 타오를  살게 구는 갱단을 쫓아내고, 갱단 문제에 민감하던 몽족 이웃들에게 영웅 대접을 받게 된다.  과정에서 타오의 누나인 수를 통해 몽족의 문화와 그들이 자신을 환대하는 방식을 배운 그는 조금씩 과거에만 갇혀있던 자신을 돌아보고 점차 오늘날을 살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20세기에 갇혀있던 심장이 21세기를 향해 다시금 뛰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타오와 가족들을 통해 인정머리 없고 쓸데없이 복잡한 오늘날의 세상에도 여전히 인간적인 가치가 남아있음을 깨닫는다. 전형적인 백인 중심 사회의 일원이며 틈만 나면 유대인, 동양인, 멕시코인을 비난하기 일쑤이던 그가 동양인 가족을 통해  삶을 살게  것이다. 이는 월트가 비로소 자신을 붙들고 있던 낡은 관념을 내려놓았다는 점을 빼더라도 의미가 있는 서사이다. 구원은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된다는 그리스도교적 가치와도 일맥상통하는 탓이다.


그리스도교 이야기가 나왔으니 자노비치 신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없겠다. 그는 월트가 살아온 구세대 미국과 대비되는 신세대 미국의 가치를 대변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스물일곱 살의 초임 신부인 그는 월트의 아내인 데이지의 부탁을 받고 월트에게 고해성사를 주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오랜 세월을 풍파와 함께 살아온 월트의 노련함 앞에서 그가 글로만 배워  모든 교육들은 너무나도 보잘것없다. 그를 과잉교육받은 스물일곱짜리 숫총각이라 부르는 월트는 고해를 주러  신부에게 오히려 삶과 죽음에 대한 가르침을 전한다.


다만 작중에서도 논해지는 것처럼, 월트의 노련함과 자노비치의 신세대적 사고방식은 상호보완적으로 작용해야 한다. 자노비치는 월트를 통해 자간 밖의 세상, 진짜 세상과 삶의 노련함을   있었지만 월트 역시 자노비치를 통해 자신이 굳이 지지 않아도  짐을 너무 오래도록 지고만 있었던 고집  노인네임을 깨닫는 것처럼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의 상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공공의 적인 갱단이라는 문제가 등장한 이후부터다. 갱단에 의해 테러당한 이웃집과 폭행당한 수를 보고 대단히 화가  월트는 자노비치와의 대화에서 비로소 그를 인정하고 작중 처음으로 그를 신부님(Father)이라 부른다.


결말부에서 비로소 자노비치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모든 짐을 내려놓은 월트는 죽음을 불사하는 타오의 용기에 자신의 훈장을 내어주는 것으로 화답한  이미 지나버린 세대의 어른으로서 신세대에게 져야  책임을 지기 위해 홀로 갱단을 찾아간다. 많은 관객들이  장면에서 복수를 위해 갱단을 무참히 쓸어버리는 월트의 모습을 상상했고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는 예상과는 달리 아무런 무장도 없이 그곳을 찾은 월트가 자신을 희생해 갱단을 감옥에 보내는 결말을 내놓는다.  문단에서 이스트우드가 다른 보수주의자들처럼 미국의 강인한 면모만을 신경 쓰지 않는다고 표현한  바로  지점을 두고   있는 말이겠다. 그는 전쟁영웅이었던 월트의 속죄와 희생을 통해 타인의 자유를 보장받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전쟁이 아니라 자기희생임을 말하고자  듯하다. 그는 새로운 세대가 무사히 자랄  있는 토양을 마련해주는 것이  세대가 그들에게 줘야 하는 사명이라고  것이다.


영화는 월트의 장례식을 거쳐 그랜 토리노를 상속받는 타오의 모습을 비추며 끝이 난다. 월트에게 있어 떠나보낸 아내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아끼는 대상인 72년식 명차 그랜 토리노는 단순한 자동차가 아니었다. 그것은 강인하고도 부드러우며 무엇보다도 자유로운, 그가 살아온 미국이라는 공간을 그대로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이 차의 연식이 다른 해도 아닌 72년인 이유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감독의 특성상 우연은 아닐 것이다. 베트남전 종전, 인종차별 폐지, 포로 석방 등 미국의 이미지 개선을 위해 애썼던 대통령인 닉슨이 재선 된 해가 바로 1972년이기 때문이다. 즉,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그랜 토리노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본인이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온 과거의 미국에 대한 은유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그랜 토리노의 키는 누구에게 넘길 거냐?"는 건설현장 친구의 질문에 아무에게나 넘기지는 않을 거라고 답한 월트의 대답이 한 층 아련하게 들릴 것이다. 이스트우드는 그 소중한 '그랜 토리노'를 타오에게 넘김으로써 미국의 미래는 특정 인종이나 특정 세력에게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의 선의를 믿으며 자유를 꿈꾸는 모두에게 있는 것임을 역설한다.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빵을 나누며  몸을 이룹니다." 그리스도교 주요 종파  하나인 성공회(Anglican Church; Episcopal Church) 전례에서 영성체 직전 드리는 기도의  문장이다. 세월은 많이 변했고 이전 세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토록 빠르게 변화하는 세월을 따라잡을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러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그려낸 따스한 세계는 세월이 그럼에도 구세대를 기다려주고, 서로 다름에도 그들이 하나가   있음을 믿으며, 구세대에게 신세대를 이끌어줄 책무를 요구하는 희망이 있는 세계인 것으로 보인다. 바로 그것이 21세기를 살아가는 보수주의자로서 이스트우드가 지니고 있을 자부심이기도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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