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터널스>, 마블 스튜디오 (2021) 단평
이터널스 (2021)
감독: 마블 스튜디오
제작: 마블 스튜디오
출연: 젬마 찬, 리차드 매든, 안젤리나 졸리 외
별점: 2/5
수 천년에 걸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온 불멸의 히어로들이 이후 인류의 가장 오래된 적 '데비안츠'에 맞서기 위해 다시 힘을 합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단평은 스포일러를 포함하지 않습니다.
초월을 가능케 하는 것은 기억이다. 인류가 현재 누리고 있는 모든 기술은 수 세기에 걸쳐 공유되어 온 기억들의 집합의 결과물이다. 기억 없이 우리는 성장하지도, 진보하지도 못했을 것이며 반대로 기억이 있었기에 인류는 오늘날 이 자리에까지 설 수 있었다. 때문에 기억의 특성은 상당 부분 물질적이라기보다는 관념적이고, 실재적이라기보다는 초월적이다. 마블 스튜디오의 스물 네 번째 장편 영화이자 클로이 자오가 연출한 영화 <이터널스>는 이러한 기억과 초월성에 대하여 다루는 작품이다.
본격적으로 우주의 기원과 물질세계를 넘어서는 관념적 영역을 다루는 작품인 만큼 영화는 기존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영화들과는 다소 동떨어진 분위기의 연출을 보여준다. 신화적 요소를 곳곳에 차용하며 광활한 대자연을 유려한 미장셴과 함께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는 시도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시도는 수작 <노매드랜드>를 연출한 감독 클로이 자오 특유의 연출 기법 탓에 더더욱 돋보인다. 말하자면 <이터널스>는 지금껏 나온 모든 MCU 영화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야심으로 가득 찬 작품이다.
그러나 그토록 비대했던 야심에 비해 영화가 시네마적으로도, 유니버스 내의 이벤트로서도 보여준 가능성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빈약한 심리묘사 및 각본과 밋밋한 액션 연출, 인물 소개만으로도 버거울 정도로 타이트한 전개 방식, 수습되지 못한 채 찝찝함만 남기는 맥거핀의 활용 등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라고 한다면 인피니티 사가가 진행되는 23편의 영화 동안 마블 스튜디오가 고수해 온 최우선의 가치라고 할 수 있는 "우리 주위에서 흔히 벌어질 수 있을 것만 같은 신화 이야기"라는 타이틀이 너무나도 쉽게 무너져버렸다는 점이 가장 클 것이다.
셀레스티얼의 지휘 아래 지구에서 7천년을 숨어 살아온 이터널스라는 초월적 존재를 묘사하기 위해 클로이 자오는 우리가 첫 문단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기억'의 메타포를 이용한다. 말하자면 이터널스는 인류의 오랜 문명 전체를 '기억하는 자들'이다. 아즈텍에서 바빌론, 1945년의 히로시마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늘상 인류의 곁에 존재하며 오직 그들을 위협하는 우주적 존재인 데비안츠 관련 분쟁에서만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자들이었다. 이러한 이들의 신비함과 초월성을 드러내는 데 있어 기억이라는 소재는 매우 훌륭하게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기억의 오류로 인해 폭주하게 된 테나와 그의 리셋(기억 제거)에 대하여 논하는 장면은 그런 점에서 클로이 자오 다운, 매우 탁월한 연출이었다.
그러나 <이터널스>를 한 편의 MCU 영화로서 철저한 실패작으로 내몬 것 역시 바로 이 기억과 초월성에 대한 부분이라는 점이 영화의 최대 아이러니이다. 수천 년간 인류의 곁에서 그들을 보호하고 때로 영감을 선사하며 함께한, 누구보다도 인류를 사랑한 수호자들이라는 플롯은 그간 마블 스튜디오가 지향해 온 현실적 영웅 이야기와는 괴리가 크다. 그것은 오히려 고전적 신화, 혹은 마블의 라이벌인 DC 확장 유니버스가 지향하는 영웅관에 가깝다. 당장 DC 유니버스 속 아마존, 아틀란티스인들의 이야기와 이터널스의 플롯을 훑어본 뒤 그 유사성을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기존의 MCU 세계관에서도 은하계의 아홉 왕국을 수호하는 아스가르드의 오딘과 같은 이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어디까지나 고도로 발전한 행성의 외계인이었으며, 인간에 비할 수는 없으나 수명 역시 존재했다. 그런 점에서 불멸의 우주적 존재인 셀레스티얼과 이터널스의 이런 방식의 등장은 기존의 MCU 시리즈의 입장에서 비일관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인피니티 스톤과 타노스라는 전 우주 절반의 생명이 달린 초유의 사태를 이미 경험한 인피니티 사가 이후의 세대를 그리는 현재의 MCU 세계를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라면 기존의 가치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 수정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히어로들이 앞으로 부닥치게 될 새로운 적들은 한층 더 높은 차원의 우주적 존재들일 것이고 그런 이들과의 지속적 충돌이 주요 이벤트로 제시되는 한 초기 MCU가 지향하던 현실적인 신화는 더 이상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가치의 변화를 위해서라면 적어도 2시간 반짜리 한 편의 영화가 아닌 하나의 페이즈 전체를 할애해서라도 설득력있는 시대의 변화를 제시했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세계관의 우주적 확장과 새로운 이야기로의 도약을 꿈꾸던 스튜디오와 클로이 자오의 '야심'은 빌드업이 부재한 급격한 변화 속에서 마치 DC 확장 유니버스가 초기 작품들에서 밟았던 것만 같은 전철을 그대로 밟는 '아집'으로 기능하고 말았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게재되었습니다. http://omn.kr/1vvb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