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리시맨>, 마틴 스콜세지 (2019)
아이리시맨 (2019)
감독: 마틴 스콜세지
출연: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 조 페시 외
별점: 5/5
20세기 미국 정치 이면에 존재했던 악명 높은 인물들과 연루된 한 남자의 시선으로 장기 미제 사건의 대명사 ‘지미 호파 실종 사건’을 그려낸다. 지미 호파는 1950-60년대 미국 정계를 좌지우지했던 거대 노동조합의 우두머리로 1975년 실종됐지만, 아직까지 그 사건의 실체가 밝혀지지 않았다. 지미 호파 실종 사건은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장기 미제 사건 중 하나다. 영화는 여러 악명 높은 범죄조직 및 인사들과 연루돼 지미 호파 실종의 용의자로 지목되었던 프랭크 시런의 시선을 통해, 미국 근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거대한 이야기를 보여준다.
<아이리시맨>은 스콜세지가 오늘날의 할리우드 영화계에 내놓은 선언과도 같은 영화다. 2천 년대의 세 번째 십 년을 고작 한 달 여 앞둔 2019년 11월 말 세상에 공개된 이 영화는 2020년을 목전에 두고 마피아 시대극으로 대변되는 20세기 시네마의 완전한 종언을 선언한다. 이는 70년대 <대부>를 통해 코폴라가 기틀을 닦았고 스콜세지 본인도 <비열한 거리>, <좋은 친구들>, <카지노> 등을 통해 큰 지분을 가져온 범죄 느와르 장르 영화에, 역시 마피아 시대극이라는 작법을 그대로 가져와 작별을 고한다는 점에서 매우 징후적이다.
영화는 일반적인 마피아 물과는 다소 동떨어진 분위기에서 시작된다. 80대의 노인이 된 프랭크 시런이 양로원에 홀로 앉아 과거의 시절을 회상하는 것이다. 영화를 보는 우리는 이 회상이 시작되는 장면에서부터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그런 추측은 프랭크의 동료였던 마피아들을 소개하는 영화의 화면을 보게 되는 순간 확신으로 변한다. 스콜세지는 그들 한 명 한 명이 언제 어디에서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를 자막으로 일일이 설명한다. 그는 그런 방식으로 프랭크가 회상하는 20세기 마피아들의 시대는 이미 지나버렸음을 역설한다.
<아이리시맨>의 이야기는 크게 세 가지 시간대를 넘나들며 전개된다. 구시대의 산물로서 21세기에 홀로 남아 과거를 회상하는 80대 노인 프랭크의 시점, 75년 빌의 결혼식으로 향하는 50대 프랭크의 시점, 그리고 갓 ‘페인트공’이 되어 마피아로서 입지를 다져가는 50년대 30대 프랭크의 시점이 그것이다. 이 세 시간대 모두에서 사건의 중심에 제시되는 인물이 지미 호파다. 트럭 노동조합의 지부장으로 활동했던 그와 러셀 등으로 대변되는 마피아들의 갈등이 주가 되며 이야기는 흘러간다. 주인공 프랭크는 러셀을 통해 마피아 세계에 입문한 후 모종의 계기로 지미 호파와의 인연을 쌓는다. 그 과정에서 존 F 케네디의 당선과 암살, 로버트 케네디가 지미를 압박하고 지미가 수감되는 등의 에피소드가 더해진다.
물론 이 모든 일화들은 미국 현대사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팩션이기에 이야기의 초점은 가장 주요한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는 지미 호파 실종에 맞춰진다. 작중에서는 결국 러셀의 사주를 받은 프랭크가 지미를 살해했던 것으로 밝혀지지만 이 역시 역사적으로 검증된 사실은 아니다. 지미와 러셀 모두의 총애를 받았던 프랭크는 감옥에 있던 사이 잃어버린 트럭 노조 지휘권을 되찾으려는 지미와 그것을 탐탁지 않아하는 러셀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러나 결국 프랭크의 선택은 자신을 처음 받아준 마피아 세력이었다.
여기에서 한 가지 특기할만한 점은 그런 프랭크의 선택이 그의 가족관계에 미친 영향이다. 마피아가 된 이후로 프랭크를 아버지로서 존경하기는커녕 두려워했던 페기를 비롯한 그의 가족들은 러셀과 같은 마피아들과 어울리는 프랭크보다는 건실한 트럭 노조 지부장의 이미지를 내세운 지미와 함께 있는 프랭크의 모습을 보다 달가워했다. 그러니 프랭크가 결국 러셀의 요청에 지미를 살해한 이후 그의 가족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로도 생각할 수 있겠다. 지미가 실종된 이후 그 자초지종을 대략적으로나마 눈치챈 페기는 그날 이후 아버지인 프랭크를 가족으로조차 취급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가족관계의 변화 이외에도 작중 지미가 죽은 이후 영화는 연출적 면에서도 큰 변화를 겪는다. 우선 이야기가 전개되는 속도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진다. 혹자는 이를 두고 지미 호파의 살해라는 여파로 인해 끝없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 프랭크의 인생이 급격하게 늙어감을 은유하는 것이라 논하기도 했다. 그 이후 이러저러한 이유로 모든 다른 프랭크의 마피아 동료들은 죽음을 맞이하고 프랭크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아 요양원에서의 삶을 보내는 것으로 이야기는 원점으로 되돌아온다. 이때 끝내 가족도 동료도 모두 잃고 홀로 남겨진 프랭크의 모습은 21세기 현대 사회로 떠넘겨져 버린 과거의 산물과도 같은 존재로 보인다.
잠시 다른 이야기로 새보자.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두고 마틴 스콜세지는 “시네마가 아닌 테마파크”라는 맥락에서 비판한 바 있다. 이는 일정 부분 일리가 있는 사실이었다. 디즈니와 마블 스튜디오를 필두로 한 할리우드 영화 프랜차이즈들이 캐릭터와 유니버스 구축에만 몰두하며 영화를 하나의 관광 상품화하는 동안 시네마의 골자라고도 할 수 있는 감독의 작가주의적 예술관을 펼치려는 시도들은 점차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20여 편의 장편 영화를 연출한 이 시대의 진정한 거장 스콜세지에게 이는 심각한 문제였다. 때문에 현대적 시네마란 어떤 방식으로 구성될 수 있는가에 대한 스콜세지의 고민 역시 여기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그런 고민이 <아이리시맨>과 같은 20세기의 심연을 응시하는 21세기 걸작을 만들어냈고 말이다.
이 즈음에서 우리는 비로소 이 영화의 결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확히는 이 영화의 결말을 코폴라의 <대부>가 종결되는 방식과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대부>는 새로운 보스인 ‘돈 콜리오네’가 된 마이클이 집무실 책상에 앉고 문이 닫히는 것으로 끝이 난다. 한편 이 영화 <아이리시맨>은 어떤가. 말동무를 해주는 간호사는 프랭크의 사진 속 지미 호파를 알아보지 못하고 프랭크는 세월이 너무도 빠르게 흘러간다며 한탄한다. 이후 프랭크는 고해성사를 마치고 떠나려는 신부에게 나갈 때 문을 ‘완전히 닫지 말고’ 조금만 열어 놓아 달라고 부탁한다. 이제 우리는 이 닫힌 문과 조금 열린 문틈의 사이가 두 영화의 모든 차이를 만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마피아들의 시대를 멋지게 그려낸 <대부>가 문이 닫히는 묘사를 통해 느와르라는 장르의 비장함을 강조했다면 그 끝나버린 시대의 처연함을 논하는 <아이리시맨>은 문틈을 조금이나마 열어놓음으로써 세월 앞에 홀로 남겨져버린 노인의 쓸쓸함을 애처롭게 그려내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시간의 희생자다. 시간, 그것은 그 누구도 위로해주지 않으며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공정하게 죽음을 선포한다. 그러나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진정으로 피해를 보는 자는 일찍이 죽음을 경험한 자가 아닌 모두의 죽음 이후 자신의 손에 묻은 닦아낼 수 없는 피를 보며 홀로 남겨진 자일 따름이다. 지나간 세월의 끝을 잡은 채 오늘날에 도달하지 못하는 프랭크의 모습은 아련하다. 카메라는 그런 그의 불안한 시선을 클로즈업하며 영화를 끝맺는다. 화면이 암전 되면 20세기는 그렇게 프랭크처럼 역사의 뒤안길에 홀로 남겨질 것이다. 이는 한 명의 영화인이자 또 한 명의 노인으로서 스콜세지가 오늘날의 시네마에 고하는 슬픈 비관론에 다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