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 왕가위 (2000) 리뷰
화양연화 (2000)
감독: 왕가위
출연: 양조위, 장만옥 외
별점: 4.5/5
같은 날 같은 아파트로 이사 온 ‘첸 부인’과 ‘차우’. 이사 첫날부터 자주 마주치던 두 사람은 ‘차우’의 넥타이와 ‘첸 부인’의 가방이 각자 배우자의 것과 똑같음을 깨닫고 그들의 관계를 눈치챈다. 그 관계의 시작이 궁금해진 두 사람은 비밀스러운 만남을 이어가고 감정이 깊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서로에게 점점 빠져들기 시작한다. "많은 일이 나도 모르게 시작되죠"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본 리뷰는 백년의 영화 유튜브에도 영상으로 공개 예정입니다.
"홍콩의 야경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군. 이렇게 아름다운 걸 잃게 되다니 너무 안타까워." 오우삼 감독의 <영웅본색>에서 주윤발이 내뱉는 대사의 한 부분이다. 이 대사는 당시 82년부터 시작된 홍콩의 중국 반환을 의식하고 쓰인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이외에도 80년대 이후 홍콩 영화의 황금기에 제작된 대부분의 영화들은 홍콩의 중국 반환에 대한 불안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식민지이며 동시에 개척지라는 홍콩이라는 공간의 이중적 특성에서 기인한다. 영국으로 대변되는 서구 열강은 홍콩을 식민 통치하며 자신들의 문화를 그곳에 도입했으나 홍콩은 완전히 서구화되지도, 그렇다고 동양으로 남지도 않은 채로 나름의 서양적이지도 동양적이지도 않은 '홍콩적인' 문화를 창조해냈다. 거기에 세계 각지에서 들어오는 이주 노동자들의 물결까지 더해지자 홍콩은 완전히 아시아와 비-아시아의 경계선 어딘가에 있는 중립적 공간이 되었다. 현재까지 홍콩의 중국 반환에 반대하는 홍콩 시민들과 예술가들의 움직임은 다른 게 아니라 이렇게 형성된 홍콩적 특성을 중국 문화의 물결 속에서 잃고 싶지 않다는 불안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경향성은 홍콩 영화계가 낳은 최고의 거장 중 한 명인 왕가위의 필모그래피에서도 역시 두드러져왔다. <중경삼림>과 <타락천사>가 대표적이다. 두 작품은 인물들의 불안을 영상으로 전달하기라도 하듯 흔들리는 헨드헬드 카메라를 이용해 당대의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홍콩의 이미지를 영화 속에 사로잡는다. 그러나 전자가 그 속에서도 피어나는 감성과 낭만에 대해 이야기하는 반면 후자는 보다 비관적으로 세기말 시민들이 겪는 외로움에 집중한 감이 크다.
그렇다면 이번에 살펴볼 작품인 <화양연화>는 어떨까? 이 작품이 홍콩의 어떤 특성을 어떤 식으로 담아내고 있는지를 살펴보기에 앞서 알아둬야 할 것이 두 가지 있다. 첫 번째는 본 작이 처음 공개된 21세기의 왕가위 영화라는 점이고, 두 번째는 본 작이 홍콩의 중국 특별행정구로의 반환 이후 처음 제작된 왕가위 영화라는 점이다. 별 것 아닌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두 지점이 이 영화에 끼치는 영향력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전자가 새로운 시대의 첫 영화라는 점에서 중요한 지점이라면, 후자는 그 새로운 시대가 앞서 언급된 것처럼 미래에 대한 낙관보다는 불안에 가까울 시대로 보인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실제로 이 두 지점은 작중에서 유효하게 작용해서, 영화 내에는 당대 홍콩의 상황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라는 측면에서의 수많은 은유가 담겨있다. 1962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가 수십 년 미래인 2000년에 대한 은유를 담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이런 점에서 보건대 이 영화를 단순히 두 남녀의 아련한 사랑 이야기를 넘어선 홍콩의 찬란했던 시절의 끝, 그리고 다가올 중국 치하 홍콩에 대한 불안이라는 측면에서 독해한다고 해도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우선 영화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검은 화면 위로 떠오르는 문장을 살펴보자. "난처한 순간이다. 여자는 고개를 숙인 채 남자에게 기회를 주지만, 남자는 다가설 용기가 없고 여자는 뒤돌아선다." 두 사람의 관계가 일시적인 것이며, 그들이 서로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서로 헤어지고 말 것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극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영화를 시작하는 것은 일순간의 찬란이라는 화양연화라는 제목에 걸맞으면서 동시에 이미 지나간 시대를 되돌릴 수는 없다는 약간의 비관이 뒤섞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두 사람을 홍콩이라는 공간으로 의인화한다면 이는 끝내 지나가버린 홍콩의 찬란했던 20세기를 은유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이번에는 주인공 두 사람의 캐릭터성을 보자. 차우와 첸 부인, 두 사람은 서로의 아내와 남편이 외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로 인한 충격과 외로움에 서로 의지하게 되는 인물들로 그려진다. 그들은 서로의 배우자에게 외도라는 상처를 받았다는 점에서 피해자이지만 끝끝내 서로 사랑하게 된다는 점에서 피해자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니까요."라는 말로 부정해보려 하지만 끝내 그들 역시 그 순간 이토록 애틋했을 것임을 깨닫는 순간 차우와 첸은 느껴버린 것이다. 이제 이 관계에서 온전한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다는 것을.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이들의 캐릭터성은 식민지이면서 동시에 개척지이고, 영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그로 인해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 성숙해진 홍콩이라는 공간을 닮았다. 이런 은유로 보았을 때 차우와 첸 부인이 언젠가 맞닥뜨릴지 모를 그들의 외도 행각을 연기하고 혹시 모를 이별 연습까지 해본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난 긴 세월 동안 지난하게도 이뤄져 온 홍콩 반환에 대한 협상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추와 첸 부인이 서로의 상실감을 달래기 위해 사랑에 빠지며 만남의 공간이 되는 곳이 작가로 전향한 차우의 작업실이라는 점 역시 의미심장하다. 서로의 상처로 인해 발생한 사랑이 오히려 새로운 창조를 가능케 했다는 의미를 지니게 되는 탓이다. 이는 식민지배와 개척의 과정에서 발생한 홍콩 고유의 문화를 상징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만남 역시 아주 짧은 시간 지속될 수밖에 없었고, 차우는 첸 부인이 남편을 떠날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홀로 싱가폴로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첸 부인은 차우에게 가진 애틋함과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를 잡지 못하며, 끝내 엇갈리고 마는 그들의 모습을 카메라는 담담하게 잡아낼 뿐이다.
영화는 영원한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은 시간 앞에서 무기력해진다는 대전제를 이끌고 달려 나간다. 특히 큰 의미가 없는 짧은 숏의 나열에 대비되는 중요한 순간에서만 사용되는 긴 숏의 활용이 매우 인상적이다. 끝내 아무것도 남지 않은 후반부의 내러티브는 말 그대로 추억이라는 이름의 지옥을 그대로 표현한 듯 아련하면서도 아프다. 왕가위는 장면 속 인물들과 거리를 둔 채 관객이 직접 그들의 외로움과 불안을 목격하게 내버려 둔다. 말하자면 회피를 통해 한 발자국을 더 나아가는 연출을 보여주는 셈이다. 그런 그의 카메라 워킹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음에도 그 무엇보다도 슬프다.
그러나 여기에서 또 하나 이야기해야 할 지점은, 끝내 헤어지게 되는 두 사람의 슬픔과 불행을 앞서 지속적으로 언급한 것처럼 단순히 개인과 개인의 아픔만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화양연화가 개인의 사랑과 이별이라는 소재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결국 그 시절의 홍콩이라는 찬란했던 순간의 끝이자 새로이 다가올 새 시대에 대한 불안이라는 감정인 탓이다. 영화의 후반부 연주되는 동명의 곡인 '화양연화'에 "나의 조국이여"라는 가사가 나오는 것 역시 이를 함축한다. 또한 그것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결말부 등장하는 세 군데의 장소, 63년의 싱가폴과 66년의 홍콩, 역시 66년의 캄보디아다.
이들의 시공간적 배경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63년 싱가폴부터.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의 식민지였던 싱가폴은 59년 자치령으로서의 지위를 얻은 후 63년 영국에서 독립한 말레이시아 연방과 합병한다. 그러나 이 합병은 이미 너무나도 달라진 싱가폴과 말레이시아의 정치, 문화적 성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다. 말레이시아의 반 싱가폴 정서가 터져 나오기도 하는 등 이러한 합병은 97년 영국으로부터의 홍콩 반환 및 홍콩의 중국 특별자치구 편입과 너무나도 닮아있다. 찰나의 아름다웠던 순간이 끝난 후 차우가 떠난 곳이 이러한 싱가폴이라는 점은 이 이상 상징적일 수 없을 만큼 뚜렷이 상징적이다.
다음으로 66년 홍콩을 보자. 1966년은 이른바 중국 문화 대혁명의 불길이 피어오르기 시작한 시절로, 홍콩 내에서도 이런 홍위병들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이들이 활개를 치며 사회, 문화적 불안이 꽃피던 시절이었다. 바로 그즈음 홍콩으로 돌아온 차우와 첸 부인은 각각 자신들이 예전에 살던 집으로 돌아가 과거의 흔적을 찾지만 그때 그 시절을 기억하게 해주는 요소들은 점차 옅게 흐려지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 시절은 지나갔고 그때의 모든 것이 전부 사라졌다."라는 문구가 표시될 즈음이면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알고 있던 화양연화의 시절은 온전히 끝이 났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는 놀랍게도 중국 치하에서의 21세기를 맞이한 홍콩 시민들이 느낄 감정과 너무나도 닮아 있다.
마지막인 66년 캄보디아. 이곳 앙코르왓의 어느 유적에서 차우는 파인 벽면의 틈으로 자신의 찬란했던 시절을 말하고 흙으로 묻어낸다. 그렇게 그 시절은 우리의 그리움이라는 공간 외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으로 영원히 지나버린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캄보디아와 앙코르왓이라는 공간이 홍콩과 비슷한 식민지배를 받았던 공간이라는 점일 테다. 프랑스의 드골 장군이 캄보디아를 방문하는 장면이 푸티지로 중요하게 그려지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이처럼 왕가위는 세 군데의 시간과 장소에서의 에피소드를 통해 찬란했던 시절의 끝과 다가올 미지와도 같은 새로운 시대를 차우와 첸 부인이라는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 속에 완연히 녹여내는 데 성공한다. 이 영화의 백미가 다른 부분도 아닌 극의 결말에 있는 이유이다.
"지나간 시절은 먼지 쌓인 유리창처럼 볼 수는 있지만 만질 수는 없기에 그는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유리창을 깰 수 있다면 그때로 돌아갈지 몰라도." 영화를 그대로 함축하고 있는 마지막 이 문구를 통해 왕가위는 그리움으로 만들어진 화양연화와도 같은 시절을 역설한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고 우리는 새로운 시공간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 왕가위는 중국으로 반환된 홍콩과도 같은 이 시절을 대단히 쓸쓸하게 묘사한다. 마치 적응하지 못한 시대에 대한 불안을 품기라도 한 듯이. 그러나 우리 모두는 옛 것을 친숙해하고 새 것을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에 어쩌면 왕가위는 21세기를 두려워하며 표류하고 있을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이 영화를 선물한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