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데타>, 폴 버호벤 (2021) 리뷰
베네데타 (2021)
감독: 폴 버호벤
출연: 비르지니 에피라, 다프네 파타키아, 샬롯 램플링
별점: 5/5
성흔과 그리스도와의 심장 교환, 신과의 결혼 등 종교적이고 에로틱한 무아경으로 신비주의로 추앙받으며 수녀원장에 오른 베네데타. 수녀원에 들어온 바르톨로메아라는 처녀와의 사랑이 교회에 적발되면서 한 순간에 불경한 창녀로 매도되는데...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크레딧이 오르는 스크린 앞에서, 무의식적으로 성호를 그었다. 분명 그것은 올해 겪은 가장 기묘한 경험이었다. 이토록 세속적 공간 앞에서 엄숙하게 긋는 성호라니. 그러나 신성과 세속, 문명과 야만, 승천과 타락, 그리고 기적과 광기는 세계 속에서 그토록 적확하게 이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폴 버호벤이 지금껏 그려온 영화 세계처럼, 일순 모든 것이 모호해졌다. 그 모든 것이 한 편의 시네마로 스크린에 담긴 두 시간이 지난 후 필자가 화답할 수 있는 반응은 거친 탄성뿐이었다.
딱 떨어지지 않는 모호함을 통해 세계를 환기시키는 연출은 어찌 보면 폴 버호벤의 장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 실제로 그는 본격적인 상업 블록버스터 영화를 만들던 80년대부터 이런 시도를 영화 속에서 지속적으로 보여 왔다. 그의 80년대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로보캅>이 프로그램화된 로봇과 결합하여 사이보그가 된 머피가 과연 인간인가 하는 모호함을 통해 윤리적 질문을 던졌다면 90년대 첫 영화인 <토탈 리콜>에서는 영화 속 퀘이드의 경험이 현실인지 리콜된 이식 기억인지를 모호하게 표현함으로써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다. <원초적 본능>은 또 어떤가.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캐서린을 유력 용의자로 조명하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 역시 끊임없이 던짐으로써 모호함을 선사하는데 이는 어찌 보면 진실의 세계 저편에 있는 우리 인식에 대한 질문으로 읽힐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번에 살펴볼 영화이자 버호벤의 <엘르> 이후 5년 만의 신작인 <베네데타>는 어떨까. 성흔의 발현이라는 신비주의적 사건으로 수녀원장 자리에까지 올랐으나 동성애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 베네데타의 17세기 실화를 바탕으로 한 본 작은 기적과 신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그러나 그런 주제 탓에 이 영화를 형이상학적, 그러니까 정신과 절대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영화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베네데타>는 그런 형이상학적 존재론이 현실 세계에 미치는 영향을 논하는 작품이며, 때문에 지극히 형이하학적 맥락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해지는 것이 위에서 언급한 버호벤의 '모호함'에 대한 연출이다. 앞선 세 편의 영화들에서 20세기 후반의 버호벤이 모호함을 통해 윤리, 존재, 인식에 대한 질문을 던져왔다면 2021년의 버호벤은 같은 연출 방식을 이용하되 2016년 <엘르>에서 논한 성과 야만이라는 주제의식을 확장하여 '현실'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때문에 베네데타에게 벌어진 사건이 기적인지 광기인지, 작중 그려지는 가톨릭 교회의 모습이 신성인지 불경인지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영화의 논점은 형이상학적 존재가 현실을 살아가는 '형이하적' 인간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드러내는 것에 맞춰진다.
이제 영화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의 캐릭터성을 논하면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 보도록 하자. 우선 전 수녀원장 펠리시타부터. 초반부 지참금에 대한 언급에서부터 드러나듯이 그는 애당초 신앙심과는 거리가 먼 세속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어린 베네데타가 성모상에 깔리고도 다치지 않는 사건이 일어나자 "기적 같은 사건은 골칫거리일 뿐"이라는 맥락으로 회의하는 등 그는 철저히 그리스도교를 수단으로만 대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베네데타의 성흔 사건이 일어나고 신비주의적 체험을 이유로 베네데타가 새 수녀원장에 임명되고 페샤가 성지 취급을 받게 되자 출세를 위한 정치싸움에 이용하기 위해 그의 기적을 긍정한다. 그 과정에서 딸을 잃게 된 그는 복수심에 베네데타를 교회 재판에 고발한다. 이런 면모는 신성 등의 형이상학적 개념 역시 그저 인간의 출세욕이나 악의를 위해 이용될 수 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페스트 발병 이후 방향을 돌려 베네데타가 아닌 교회 자체를 향하는 그의 분노를, 끝내 스스로 불길에 자신을 던지는 그의 모습을 보다 보면 우리는 어느덧 서늘한 소름을 느끼게 된다.
이런 펠리시타의 캐릭터성은 교황대사와 주임신부, 그 외 가톨릭 성직자들의 면모에서 보다 확장되어 드러난다. 펠리시타가 신앙심이 부재한 자로 인해 이용되는 신성이라는 주제의식을 드러냈다면 이들은 반대로 자신들의 전통을 신성 그 자체로 진심으로 믿는 이들이 행하는 기적과 광기의 외줄 타기 같은 면모를 드러낸다. 또한 교회 조직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베네데타를 화형 시키려는 교황대사, 혹은 주교가 되기 위해 의심스러운 정황에도 불구하고 기적을 공인된 사건으로 공표하려는 페샤 주임신부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이들 역시 펠리시타만큼이나 자신의 안위를 위해 얼마든 믿음을 이용할 수 있는 이들임을 알게 된다. 영화는 후반부 페스트의 유행이라는 흐름을 통해 이런 그들의 얄팍한 신앙심 역시 인류가 손쓸 수 없는 재난 앞에서는 무기력해짐을 신랄하게 조롱한다. 페스트로 죽기 전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교황대사에게 도움을 내미는 해당 지역 '주임 신부'의 모습이 이를 잘 드러낸다. 또한 영화는 바르톨로메아를 자백시키기 위한 성고문은 신성한 것으로, 반면 바르톨로메아와 베네데타의 동성애는 신성모독을 비롯한 불경한 것으로 치부하는 이중잣대를 통해 이들이 논하는 신성 개념 자체가 너무나도 위태로운 것임을 논하기도 한다.
한편 바르톨로메아는 그리스도교 세계관이 논하는 것처럼 딱 잘라 이분될 수는 없는 신성과 불경, 문명과 야만 등의 이분법적 개념으로부터 '금기'란 무엇인가를 질문하게 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에서 비로소 근본적인 질문을 내뱉을 수 있다는 오랜 격언처럼, 그리스도교적 개념에 대해서는 이해가 거의 없는 바르톨로메아이기에 할 수 있는 질문인 점이다. 사랑하는 이와의 성관계를 위해 성모상의 아래를 깎아 딜도를 만드는 모습에서 이런 면모가 대표적으로 드러난다. 영화는 그런 그를 통해 (성흔이 조작이라 가정한다면) 자해하는 이는 성녀가, 사랑하는 이는 창녀가 되냐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그로부터 우리는 신앙의 역설에 빠지게 된다.
마지막으로 베네데타를 살펴보자. 영화의 제목이자 주인공인 그는 작중 버호벤이 논하고자 하는 '모호함'을 의인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다. 성녀로 추앙받다가 창녀로 매도당하는 그이지만 그는 사실 스스로도 자신이 기적을 일으킨 것인지 그저 광기에 휩싸인 것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이는 사실 '주님의 뜻은 누구도 알 수 없다.'는 맥락에서 본다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심지어 그 주님이 존재 하는지조차도 알 수 없는 탓이다. 이런 베네데타의 캐릭터성은 관객들로 하여금 절대자를 상정하는 것 자체의 정당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또한 마지막 시퀀스에서 화형 선고로부터의 탈출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교회로 돌아가며 모진 취급을 감수하고 평생을 수녀원에서 사는 그의 모습, 거기에 더해 예언대로 그의 존재 탓인지는 알 수 없으나 페샤에만은 전염병이 돌지 않았다는 서술은 인류 문명이 행하고 있는 모든 전통과 믿음이 올바른 방향이 맞는지에 대한 의문까지 들게 한다. 잔혹하기까지 할 정도로 기막힌 여운과 함께 말이다.
물론 이처럼 뛰어난 구석으로 가득한 이 영화에도 아쉬운 점은 있었다. 영화의 말미, 스스로 불길로 펠리시타의 모습을 비추며 영화가 한껏 감정을 고양시킨 이후 필자는 당연히 영화가 이 장면을 끝으로 결말을 맞이할 것이라 보았다. 그러나 이어진 다음 시퀀스는 에덴동산에 대한 메타포나 베네데타의 수녀원으로의 복귀와 같은 이후 내용에 대한 설명을 감안하더라도 굳이 필요한 장면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오히려 필자는 불타는 펠리시타의 시퀀스를 마지막으로 영화를 마무리했다면 영화가 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글을 마치기에 앞서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역사학계에서 흔히 쓰이는 표어 중에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다.'라는 말이 있다. 필자는 이 명제에 동의하지 않는다. 민족이라는 개념은 상상'되었을' 지언정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허구의 것은 아닌 탓이다. 그리스도교적 맥락의 절대자에 대한 개념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이 현실 외부의 세계에 실재하는지의 여부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믿는 수많은 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며 그로 인해 세계가 어떤 영향을 받는지에 관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베네데타>는 신성이나 기적 따위가 과연 존재하는가에 대해 묻는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기적이나 신성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져 온 수많은 윤리적 딜레마에 대하여 섬찟한 조소를 날리는 영화일 따름이다.
성모상의 아래를 깎아 만든 딜도처럼, 기적과 광기란 이분 불가한 양날의 검이기에 어느 한쪽을 적확하게 구분하기란 불가능하다. 버호벤은 그러한 경계선의 모호함을 외줄을 타는 곡예사마냥 현란하게 연출해낸다. 블록버스터 액션과 스릴러의 최전방에 서있던 할리우드 오락영화의 기수가 정확히 같은 애티튜드를 통하여 이토록 탁월한 고찰이 담긴 시네마를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필자는 <베네데타>를 보고서 비로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이제 큐브릭과 같은 반열에 올랐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