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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 청천 Aug 29. 2023

엄마타임에 살고 있습니다










42일만에 드디어 아기와 떨어져 혼자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2시간.


집을 박차고 나와 근처 카페를 찾아들어갔다. 심장을 두드리는 팝음악과 사람들의 화기애애한 속삭임들이 넘친다. 카페인 한 모금이 짜릿하다. 오롯이 나 혼자 있는 평온함, 예상 가능한 안정감, 내 취향, 내 선택, 내 플로우, 내 삶을 컨트롤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아기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그래서 아기는 모든 시간, 양육자가 자신에게 집중해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꼭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있다. 식당에서 종업원을 찾는 딩동벨과 같은 울음소리다. 돌아서면 딩동, 딩동, 딩동!


이 딩동 소리는 내 인생에서 ‘원래’ 취하고 있던 기본값들을 부수고 우선예약을 넣는다. 밥을 먹는다, 잠을 잔다, 샤워를 한다, 글을 쓴다, 집 밖을 나간다, 등의 아주 당연한 것이 건건이 점검받는다. 공기 같이 흐르던 행동들도 내가 하고 싶은 시간에 할 수 없는데, 공부를 하거나 일을 도모하는 것은 말해 뭐해.





아기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나는 몇번이고 허공에 질문을 던졌다. 나는 누구고 여긴 어디인가에 대해서 말이다. 한 달이 되었을 때 내가 내린 결론은 나는 ‘엄마타임’에 있다는 것이다. 내 이름 석자가 아니라 아기 이름 석자 그의 엄마로서 살아야하는 그 시간 안에 나는 갇혀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30년 넘는 세월동안 아침에 눈 떠서 맞이한 내 시간은 의심 없이 내가 썼다. 그래서 나의 시간은 내 것이고, 나의 하루는 내가 운용할 수 있었다. 나는 엄마가 되어도 나를 위한 시간이 존재할 것이라고 착각했다. 내 시간에는 어떤 것을 할지를 짜두기도 했다. 그러니까 나는, ‘엄마타임’에 들어가면서 내 인생 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양육시간은, 내 시간과 아기의 시간이 아니다. 양육시간은 보육시간과 대시시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기시간인데 이게 대기시간인줄 모르고 자신의 시간으로 생각한다면 아기가 방해물로 전락한다. 아기를 방해물로 만드는 것은 나의 전제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인생에 아기가 들어와서, 함께 꾸려가는 것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엄마타임에는 내 인생은 없고 아기 인생에 내가 들어가서, 서포트하는 것이었다.


내가 결정했고, 내게는 사랑스러운 아기가 있잖아,라고 마음은 먹지만, 나도 인간인지라... 나도 먹고, 자고, 싸야하는데, 그 기본 욕구를 미뤄야하니 좋은 마음만으로는 조금... 어렵다. 이 시기가 지나고 나면 나도 남들처럼, 그때가 좋았다고 별일도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 아 하루가 너무 길다. 시간아 달려라.





42일 만에 탈출했는데, 결국 아기와의 생활을 곱씹는데 2시간을 몽땅 썼다. 이렇게 내 삶과 아기의 삶이 합쳐지나 보다. 이러다 SNS 프로필에, 아기사진이 자신인 것 마냥 올라가고, 그러다 아이를 위해서라며 아이의 꿈에 간섭하고, 그러다 드라마처럼 외치는 것 아냐???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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