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P年01月
예정일 D-4. 일어나서부터 묘한 기분이 일렁였다.
그날은 대출서류에 사인하러 은행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나갈 채비를 마치고도 느낌이 이상해서 나는 혼자 집을 서성였다. 이윽고 마음을 먹고 집을 나섰다. 내딛는 발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겁게 바닥에 붙었다. 뒤 뚱 뒤 뚱 버스를 탔다. 계획은 은행 업무를 끝내고 혼자 맛있는 외식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집으로 가는 1시간이 길게 느껴져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 카페 탐앤탐스가 보였다. 저것이라도 먹어야겠어! 오늘이 임신 상태의 마지막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산전 만찬 딸기치즈조각케이크를 샀다. 그러고 보니 임신하고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었다. 퇴근한 그이와 사진도 몇 컷 찍었다. 샤워도 했고, 짐도 쌌고, 이제 마음 느긋하게 기다리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배가 지긋하게 아파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규칙적이지는 않았다.
새벽 4시에 눈이 번쩍 뜨이더니 낑낑대기 시작했다. 5시부터 규칙적으로 10분 간격으로 배가 조였다 풀어졌다. 6시에 병원으로 전화를 했다. 의사에게 연결해주었다. 의사가 잠꼬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힘들면 병원 오세요. 견딜 수 있으면 견딜 만큼 견디다가 오세요. 와도 기다리는 것 밖에 할 것 없어요.’ 출동 대기 중이라며 실눈을 열심히 뜨고 있는 그이가 보였다. 좀 더 집에서 견뎌보기로 했다. 아침이 되었다. 일어나 몇 걸음 걷는데, 사타구니 안쪽에서 걸리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가 곧 사라졌다. 새벽동안 자궁문이 처음으로 열리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예정일 D-3. 새벽에 겪던 배 아픔이 사라졌다. 오전이 흐르고, 오후가 흘렀다. 15시쯤 피 섞인 점액뭉텅이가 나왔다. 이런 것을 ‘이슬’이라고 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이의 대기 상태는 지치기 시작했다. 나는 규칙적 진통도 아니고 참을만한 통증이 간간이 올뿐이라, 샐쭉하게 그이의 게임을 윤허했다. 저녁을 먹고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그이의 좀비 게임, 총소리와 해괴한 여자 비명소리가 귀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일어서자 양수인가 싶은 것이 다리를 타고 후두둑 흘렀다. 20시 30분쯤이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번에는 돌아오더라도 병원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에 도착해서 상태를 말했다. 간호사가 주는 천으로(분명 옷이지만 옷이아님) 갈아입었다. 그이와 불 꺼진 병원 로비에서 헤어졌다. 혼자 의료용 침대에 누웠다. 태동검사를 했다. 얼마 있어 의사가 도착했다. 내진을 하겠다고 했다. 손이 자궁 속을 쑤시고 들어왔다. 새빨간 피가 콸콸콸 쏟아졌다. 자궁이 2cm 열렸다고 했다. 의사가 간호사에게 입원 준비를 하라고 했다. 간호사가 물었다. 가족분만실을 쓸 것인지, 일반실을 쓸 것인지, 무통을 맞을 것인지 말 것인지, 회복시간동안 1인실 2인실 다인실 중에 어떤 곳을 쓸 것인지를 결정하라고 했다. 침착하고 고상하게 대답했다. 병실을 옮길 때도 내 피가 바닥에 떨어져서 다른 사람들이 치울 것을 걱정했다. 내 이미지, 남 걱정을 챙길 정신이 있던 상태였다.
가족분만실이라고 해서 아늑하고 따뜻한 느낌일줄 알았다. 그냥 삭막했다. 100% 효율성만 추구한 수술용 침대에 누웠다. 다리를 벌리게 하는 받침대가 침대 양쪽에 달려 있었고, 차가운 흰색 벽과 등, 한쪽에 낡은 소파, 그리고 피 묻은 커튼이 있었다.
링겔을 꽂았고, 제모를 하고, 관장을 했다. 척추 내부 경막에 무통 마취제를 넣을 관을 삽입했다. 점점 강도가 높아지던 통증은 그때부터 차원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의사가 말하던 견딜 수 없이 아픈 정도가 이 정도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개를 살짝 돌리면 시계가 보였다. 이 파도는 5분 간격으로 밀려왔다. 시간이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그래도, 이후의 아픔에 비하면 살만한 정도였다. 5분 주기에서 3분 아프고 숨 쉴 1~2분이 있어 다음 고통을 견딜 수 있었다. 그리고 달려온 엄마가 내 발을 주물러줬다. 초반의 아픔은 엄마의 손길로 버텼다.
12시가 넘어갔다. 예정일 D-2. 통증의 강도는 이 세상의 것을 넘어갔다. 하필 나는 약한 허리를 가지고 있었다. 남들은 자궁이 수축 이완되면서 배가 아프다고 했는데 나는 허리로 전해지는 통증 때문에 배는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누가 전기톱을 들고 내 허리뼈를 톱질하는 것 같았다. 머릿속에는 ‘언제까지 견뎌야 무통을 맞을 수 있는가’ 밖에 없었다. 자궁이 절반은 열려야 무통마취가 들어갈 수 있다는 간호사의 말에 견디고 견뎠다.
‘진짜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메우자 간호사를 불러 무통 마취제를 맞았다. 척추로 차가운 액체가 들어갔다.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어? 그거 들어갔다고 지옥문을 깨고 올라온 기분이었다. 허리통증을 줄여줘서 이제 배가 어떻게 아프다는 것인지 알게 되었다. 이정도면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이 상태로 출산까지 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먹었다. 그러나 희망은 1시간을 못 갔다. 내 경우에는 무통마취가 1시간 만에 사라졌다. 다시 지옥이 시작되었다.
태동검사기는 두 가지 숫자가 나온다. 아기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숫자와 엄마의 진통을 나타내는 숫자. 어떤 기준으로 진통 수치를 나타내는지는 모르겠다. 사람에 따라 같은 수치가 나와도 전혀 고통이 없어서 오히려 제왕절개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수치가 높을 때 참을만하고 수치가 낮을 때 허리가 틀려서 뼈가 부서지는 것 같기도 했다.
새벽이라서 간호사도 의사도 들어오지 않았다. 아직이라며 내일 오전이나 되어야 낳겠다며 나갔다. 남편도 엄마도 잠들었다. 나는 혼자 1분 간격으로 나는 흐느껴 울었다. 새벽 3시 즈음은 내게 오천년처럼 느껴졌다. 인생의 일시정지 버튼을 만들어 제발 누르고 싶었다. 정지는 못해도 일시 정시 한번만...
5에시는 형용할 수 없는 절절함이 온몸에서 우러나왔다. 그이와 엄마는 누워, 엎드려 나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다. 아기가 몸을 돌리며 내려가다가 같은 구간에서 계속 돌고 있음이 30분 이상 느껴졌다. 마음은 아픔을 느끼기를 포기하고 축 늘어졌는데, 매번 몸은 굳이 소리 내며 아팠다. 그이를 깨워 간호사를 부르라고 했다. 무통 마취를 넣었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간호사는 내진했고 의사를 불렀다. 의사는 내진하더니 ‘잘하네. 이제 낳아도 되겠다.’며 간호사에게 준비를 시켰다.
그이를 커튼 밖으로 내보냈다. 본격적으로 출산을 연습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참았다가 쭉 힘을 주라고 했다. 그게 안됐다. 이미 고갈될 때로 고갈된 몸이었다. 힘을 줄 때 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상체를 앞으로 내밀며 힘을 줘야하는데 손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어디로 힘을 내뱉아야 하는지 나는 아무래도 모르는 것 같았다. 의사는 타이르며 말했다. ‘이거 엄마가 안하면 안 되는 거야. 우리 아무도 못 도와줘.’ 골반뼈가 으스러지는 것 같았다. 아기 생각도 안 나고 여과 없이 머릿속 문장이 입 밖으로 흘렀다. ‘너무 아파요. 저 너무 아파요’
그래도 그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못하겠다는 말. 못하겠다는 ‘ㅁ’이 입술 끝에 매달려 므르르르 떨렸다. 내가 정신 차려야한다. 할 수 있다. 괜찮다. 계속 되뇌었다.
‘이번 힘주는게 마지막이야. 이번에 멈추면 안 돼. 아기 울 때까지 힘줘야 돼’ 의사는 그렇게 말하더니 수술대 모양을 바꿔 준비시켰다. 골반에 머리를 두고 힘들어하고 있을 아기를 떠올렸다. ‘이번에 진통 올 때 그때 하는 거야. 진통 삼키지마. 자 자자 힘줘!’
“20**년 1월 20일 7:30분입니다.”
예정일 이틀 전, 11시간 진통 끝에 아기는 세상에 나왔다. 끝났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아기는 멀리서 온몸으로 소리 내어 울고 있었다. 너덜너덜해진 나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의사는 자궁을 힘껏 쥐어짜고 눌러 태반을 빼고, 절개된 회음부를 봉합했다. 간호사가 바닥에 흥건한 피를 닦았다. 눈도 못 뜨고, 손도 발도 머리도 주체 할 줄 모르는 빨간 아기를 손이 닿지 않을 거리에서 잠깐 만났다.
아기가 태어나면 우리 가족 셋이 만나, 사랑한다고 수고했다고 껴안고 속삭일 줄 알았다. 어떤 감동적인 순간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상상이 있었다. 현실은 달랐다. 인고의 전쟁을 치른 피투성이 두 여자는 각자 제 살기에 바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