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P年01月
나는 보통 여행 가기 며칠 전부터 캐리어를 열어둔다. 그리고 생각날 때마다 필요한 물품을 던져둔다. 여행은 아니지만 침대 곁에 캐리어를 두었다. 집을 며칠간 떠나는 것이 여행이라고 우기면 여행이라고 볼 수도 있는 ‘예정된 모험일’이 있으므로. 나는 준비물이 필요했다. 병원에서 준비하라고 하는 목록을 보고 하나씩 채워 가고 있다. 대부분 현재 쓰고 있는 것을 짐으로 싸야하는 것이라 캐리어는 벽에 기대어 ‘ㄴ’모양으로 열어둔 채 필요한 것을 꺼내 쓰기도, 넣어두기도 한다.
확실히 임신말기는 움직임이 달라진다. 삐그덕거리는 슬로우모션처럼 일어난다. 입에서는 ‘읏짜’, ‘아이고’가 절로 나온다. 가장 무리가 가는 것은 허리다. 매일 하루 두 번씩 하는 세수와 설거지는...참 아파... 설거지를 하려면 개수대로 팔을 뻗어야한다. 그런데 배가 나와 있고 배를 누를 수가 없으니 허리를 애매한 각도로 숙여 팔을 뻗는다. 허리에 무거운 추를 매달고 각도를 굽히고 서서 노동하려니 아플 수밖에 없다.
발톱을 깎거나 무언가를 줍거나 하는, 몸을 접는 모든 행위를 할 때는 기분이 나쁘다. 몸을 굽히면, 명치 쪽으로 올라와 있는 나의 장기들이 눌리기 때문이다.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 누가 내 폐를 공격한다. 그런데 그 공격자가 나다. 혼자 어쩔 수 없이, 잠깐 잠깐 언짢다.
그래도 나는 매일, 임신초기보다 이게 낫다고 생각한다. 몸 고생스러운 것이 정신적 피폐보다는 행복하다. 나는 나름 정신력이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임신초기 오는 호르몬에 의한 정신지배는 내가 견디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배가 곧 터질 것처럼 빵빵하게 팽창되어 있다. 살이 견디지 못하고 찢어질 것 같다. 수시로 가렵다는 것은 피부가 내게 보내는 신호다. 이렇게 내 살은, 돌아오지 못 할 수도 있는 강을 건너가며 늘어나주고 있는데, 아가에게는 작은 공간이었나 보다. 2.6kg밖에 안되었는데 양수가 줄었다고 한다. 양수가 줄었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고 의사에게 물었다. 더 이상 아기가 자랄 환경이 조성되지 않는다는 말이라고 했다.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문제도 아닌데 뭔가 아가에게 미안했다.
“5분 주기로 배가 아프면 아기 낳으러 병원 오세요.”
나는 의사에게 어느 정도로 아파야 하냐고 물었다. 그러자 병원에 오고 싶을 정도로 아플 테니까 걱정 말라고 했다. 현답을 듣고서야 우문인줄 알았다. 출산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자 조금 초조해졌다. 인터넷으로 몇 명의 출산당일 후기를 읽었다. '가진통'은 불규칙적으로 아픈 것이고 길게는 하루 이틀 계속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진통'은 규칙적으로 아프며 이 통증이 '진짜 아픔'이라고 했다. 가진통으로 아플 때는 병원에 가도 내진 후에 집으로 돌려보내기도 한다고 했다. 내가 진짜(많이) 아픈지 가짜(적게) 아픈지 구분할 수 있을까? (왜 비교적 적게 아픈 것을 '가짜'라고 하는거야) 가진통으로 나 혼자 병원이랑 집이랑 왔다 갔다 하면 서럽겠는데? 우울한 생각이 스쳤다.
그러다 생각을 바꿨다.
아니다. 혼자가 아니다.
아가랑 둘이서 하는 것이다. 할 수 있다. 괜찮다.
괜찮아 아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