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O年10月
1. 세상은 살만한 곳
아기가 태어나기까지 100여일 정도가 남았다. 임신 중기를 지나고 있다. 내가 입덧을 심하게 한 편도 아닌데 세상이 그렇게 지옥 같더니, 지금 상태는 아주 아주 해피하다. 나는 이제 정상인의 멘탈 상태를 가지고 있다는 말씀. 음화화화!
생각해보면, 한 사람이 30년 넘게 살던 몸인데, 두 사람이 살 수 있게 바꿔야 한다. 타격이 올 수밖에 없다. 그런데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으니 정신적 증상을, 내가 이상한 것, 내 탓, 내가 고쳐야하는 것으로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초기에는 하루하루 날짜만 헤아렸다. 내 몸과 정신의 중요한 요소들은 아기에게 지원나간 상태였다. 그래서 그때 나는 나를 바보로 만들어줄 TV를 잡고 하루를 견뎠다.
그런데 웬일이야! 거짓말처럼 하루아침에 내가 복귀했다. 돌아와서 보니 도대체 TV를 왜 봤는지, 사소한 음식 하나에 서러워 왜 눈물을 뚝뚝 흘렸는지, 없어진 미각과 절망이 평생 갈 것이라고 왜 확신했는지, 도대체 알 수 없다! 요즘은 예전처럼 생글생글이다. 세상에는 재밌는 것들이 많다. 세상은 살만한 곳이야.
2. 세상의 이면
임신 초기는 불안했다. 그래서 프리랜서 강사라는 직업 특성을 믿고 일을 조율했다. 초기 유산은 대부분 염색체 이상으로 자연유산이 된다고 했다. 하지만 겉보기에는 엄마가 데리고 있다가 유산된 것이다. 나는 최악의 상황에 자책하고 혹시 모를 주변의 눈빛까지 맞고 싶지 않아서 조심했다.
그러다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줄였던 일을 늘렸다. 다시 일을 하면서 ‘나’로서 살 수 있어 기뻤다. 아기가 태어나면 독박육아를 해야 하는 앞날이 예상되었기에, 할 수 있을 때 더 일하고 싶었다. 물론 ‘분유 값이라도 벌어두어야지’라는 책임감도 있었다.
얼마 전, 교육 리허설을 끝내고 점심을 먹고 기분 좋게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 전화가 걸려왔다. 나에게 여러 건의 강의를 수주한 대표의 전화였다. 반갑게 받았다. 그는 우리가 하기로 했던 강의의 날짜들을 되짚었다. 그리고 내게 힘들지 않겠냐고 물었다. ‘저번에 보니까 배가 많이 나왔던데’라는 말을 반복했다. 괜찮냐는 말에도 뉘앙스가 있다. 설마 설마하며 보기 불편하냐고... 물었다. 그러자, 아무래도 임산부 일시키는게 주변에서 보기 조금 그렇지 않겠느냐고 했다.
...알겠다고 했다. 다음에 도움이 될 때 함께 하겠다고 했다. 전화를 끊었다. 서글펐다.
임산부니까 조금 배려해서 함께 하자는 사회가 아니라, 신경 써 줘야하고 효율성이 떨어지니까 놓고 가자는 사회 속에 있는 것이 서글펐다. 정상인들이 보기에 마음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내게 묻지도 않고 결정되는 구조 속에 있다는 것이 서글펐다. 사람 취급보다 교체되는 부품 같아서 울적했다. 이건 임산부만 받는 서글픔이 아니다. 재취업을 준비하는 고령자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를 했을 때, 그분들이 했던 호소도 비슷했다. 많은 분들이 나도 할 수 있는데 나를 안 써준다고 원통해 했다. 약한건 쓸모없다며 툭 쳐서 저 멀리 밀려난 기분이다. 나도 안다. 일이란게 그렇지 뭐. 어쨌든 내가 사는 곳, 이 사회의 방향이 서글픈 것은 서글픈 것이다. 그러니 나는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겠지. 신나게. ~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