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아가 엘림이 엄마로 다시 태어나다

하나님께 날마다 감사를 돌리는, 행복한 육아를 꿈꾸는 뉴질랜드 엘림이네

by Leena

아가 엘림이가 태어나기 전, 브런치에 엘림이에 대한 태교일기를 쓰려고 매거진을 만들어 놓고 한 개의 포스팅도 하지 못했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지금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아무리 정리하려고 노력해도 서너 줄을 넘기지 못했고 결국 출산 때까지 한 개의 포스팅도 완료하지 못한 채 태교일기 프로젝트는 끝이 나 버렸습니다.


뱃속에 있던 아가 엘림이가 태어나고 엘림이의 사진과 동영상을 인스타그램 (Instagram)에 업로드하며 그날 그날 느끼는 감정들을 사진과 함께 적었습니다. 태교일기 때와는 다르게 적고 싶은 내용도, 하고픈 말도 참 많아서 어렵지 않게 써 나간 포스트들이 한편, 한편 모여 저만의 육아일기그램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뒤죽박죽 생각나는 대로 마구잡이로 인스타에 업로드 중인 육아일기를 이 곳, 브런치에 순서에 맞게 하나하나 정리하여 포스팅할까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오직 기쁨과 감사함으로 아가 엘림이를 키우는 저의 육아일기를 통해 육아하는 많은 엄마들이 함께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고, 주님 안에서 아기로 인해 기뻐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아가 엘림이를 키우며 도움이 됐던 육아 꿀팁도 포스트 중간중간 함께 나눌 예정입니다. 유익한 콘텐츠가 많아, 신생아 육아하시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본격적인 육아 일기를 시작하기 전에, 아가 엘림이의 엄마인 저에 대한 소개가 먼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지난 7월 7일, 성경 묵상을 하며 느꼈던 감정을 적은 글을 공유합니다. 25년간 발 딛고 살아온 한국을 떠나, 뉴질랜드에서 어떻게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됐는지를 비롯하여 제 인생 전반에 대한 소개가 담겨 있습니다. 어떤 일을 계기로 크리스천이 되었는지, 앞으로 공유하게 될 크리스천으로서 하나님 안에서 어떤 축복을 받으며 어떻게 육아하고 있는지 등의 스토리를 이해하시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런 걸 랜선 간증(...ㅋㅋㅋ)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의 성경 말씀 묵상: 2018년 7월 7일 (토)

출애굽기 3:13-22

제목: 놀라운 하나님의 이름, 놀라운 나의 이름 - 이스스나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을 만난 모세가 하나님께 여쭙는 장면이 나온다. 자신을 부르시고 보내시는 분,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다고 하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은 대답하신다. “나의 이름은 여호와 곧 스스로 있는 자이다” (I AM WHO I AM.)


스스로 있는 자, 하나님. 그렇게 성경을 읽으면서도 무심히 넘어갔던 이 구절이 오늘은 마음을 깊이 울린다. 스스로라니. 이거 내 이름 뜻과 참 비슷하잖아....? 내 이름은 이스스나. 엄마가 지어주신 이름인데 한글 이름이 유행이었던 86년 그 시절에 트렌드세터였던 우리 친정 엄마는 순 한글 이름인 이스스나라는 이름을 내게 지어주시면서 이렇게 뜻하셨다. “스스로 나아가라”.


나는 여태껏 내 이름대로 살았다. 언제나 나는 이름처럼 뭐든 나 스스로 해야 할 것만 같았고, 내가 주체가 되어서 스스로 홀로 열심히도 살았다.


어릴 적엔 엄마와 함께 교회를 다녔다. 엄마는 교회 주일학교 초등 저학년부터 고학년, 또래 아이들의 선생님이셨고, 나는 그런 엄마가 자랑스러워 다른 아이들 앞에서 어깨를 으쓱대며 열심히 교회를 따라다녔다. 여름 성경학교, 어린이 성가대, 어린이 찬양대회, 달란트 시장... 어릴 적 교회에 대한 좋은 추억이 아직도 기억 속에 많이 남아있다. 나는 천성이 뭘 잘 못 버리는 성격인데 결혼 전 친정집에서 짐을 정리하다가 보니 ‘어린이 성가대 반주:이스스나’ 라고 적힌 그 시절 주보가 스물일곱 되던 해까지 모아져 있기도 했었다. 내 이름이 들어간 주보는 버리지 않고 모아두는 게 어린 시절의 이스스나에게 하나의 즐거움이자 뿌듯함이었다. 뉴질랜드에 살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한우리교회에 출석하게 되면서 봉사할 부서를 골라야 했을 때도, 이때의 행복했던 기억 때문에 그 시절에 나의 엄마가 하셨던 것처럼, 같은 나이 또래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어 졌다. 그리하여 나는 뉴질랜드에서 지난 2010년부터 2017년 연말까지, 초등 저학년부터 고학년 아이들이 속해있는 어린이 성경학교 부서, 약속의 나라에서 8년을 교사로서 아이들을 섬겼다. 아이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배우고, 선하게 살기 위해 성경을 공부하는 그 모습이 너무 예쁘고 귀해서 어린이 부서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저절로 행복해지곤 했는데 (물론 말 안 듣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귀여운 것이 함정), 잠시 엘림이의 임신으로 인해 몸이 힘들어져 교사 자리를 내려놓아야 했을 때 눈물이 앞을 가려 펑펑 울어야 했을 정도였다.


10대 중학생 때에는 드디어 질풍노도의 시기, 사춘기가 찾아왔다. 나의 사춘기는 공부를 잘해서 남들보다 높은 위치로 가겠다는 게 삶의 모든 목적이 되었던 시기였다. 스스로 정말 죽을 만큼 공부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영어 단어 공부. 첫날 50개 단어를 외우고 암기 시험을 보고, 둘째 날은 전날 외운 50개의 단어에 또 새로운 50개의 단어를 더해서 100개의 단어를 시험 보고, 그다음 날은 그전에 외운 100개의 단어에 50개의 단어를 더해 150개의 단어를 시험 보고.... 이렇게 해서 1000개의 단어를 단번에 시험 볼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다. 남편(나의 남편은 뉴질랜드 이민 1.5세대로 9살 때 뉴질랜드로 이민 왔다. 한국말을 잘 하지만,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것을 더 편해하며, 영어를 First Language로 생각한다.)은 가끔 내가 어떤 영어 단어를 말하면 '자기, 그런 단어를 알아?' 하면서 놀라곤 하는데 거의가 중학생 시절 공부한 단어들 이디. 지금 생각하니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 싶다. 좋은 성적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나는 공부만 보였고, 그때부터 나는 교회를 안 나가기 시작했다. 주일에도 나는 공부하는 게 좋았고 정말 지독하게도 공부했다. 성적은 당연히 좋았고 늘 전교권 석차 안에 들어 홀로 뿌듯해하고 우쭐해하며 다녔다. (잘난 척 좀 할게요 죄송해요 ㅋㅋㅋㅋㅋ) 이렇게 나는 점점 하나님과 멀어지며 공부와만 가까이 지냈다.

이런 하나님을 멀리하는 시기는 고등학교 때도 이어졌다. 고등학교는 중학교와 또 달랐다. 중학교 때 스스로 공부해서 성적을 올릴 수 있었다면 고등학교는 달랐다. 우리 고등학교는 누구나 알만큼 잘 알려진 민족사관고등학교처럼 자립형 사립고였는데, 광주 전라 지역을 통틀어 최고의 학교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그런 명문사학이었다. 명문 숭덕 고등학교. 지역의 수재들은 다 우리 학교로 몰려들었고, 학교 안에는 공부로 내놓으라고 하는 아이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그 시절 내가 살던 동네는 사실 그 고등학교를 갈 수 있는 지역권이 아니었음에도 나는 중학교 때의 좋은 성적을 발판 삼아 무리해서 그 학교에 지원했다. 결과는 합격. 그리하여 고등학교 시절,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1시간 버스를 타고 고등학교로 등하교하는 여정이 시작됐다. 우리 학교는 참 심하게 공부를 시켰는데 새벽 6시에 오전 자율학습을 시작해 오후 11시에 야간 자율학습이 끝났고, 야자가 끝나면 청송관이라는 도서관에 모여 원하는 사람들은 더 공부하고 갈 수 있도록 배려 (...?)했다. 나는 야자가 끝나면 12시- 1시까지 청송관에서 친한 친구와 공부를 더 하고서 막차를 겨우 올라타고 집으로 향했다. 고등학교 시절엔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야 3-4시간 밖에 안되었다. 오죽하면 우리 반 종례시간 인사는 ‘집에 다녀오겠습니다’였다. 몇 시간 후에 다시 학교로 올 것이므로....ㅎㅎ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음에도 나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어쩐지 부족한 느낌이었다. 전교권 석차에서 밀려난 적도 있었고, 또 죽을 만큼 공부해서 전교권 석차로 올라가는 일을 반복했다. 여전히 교회는 안중에 없었고 서서히 교회를 다녀야 할 이유가 있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 시절 언론에는 교회에 대한 부정한 사건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헤드라인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무튼 고등학생 때 나는 결국 공부에 좀 질렸다. 성적이 오르면 안심하고 놀고, 성적이 떨어지면 불안해서 공부했다. 그런 마음가짐이었으니.... 수능시험 결과가 예상보다 낮았다. 중학생 때부터 꾸준히, 변함없이 의대에 지원하고 싶었던 나는 모자란 점수로 인해 패닉이 되었고 담임선생님과 진로 상담을 하며 멘탈붕괴 상태로 지원할 세 곳의 대학을 정했다. 졸업 후 의학전문 대학원에 지원이 가능한 전남대학교의 생명과학 기술학부라는 곳을 안전빵(?)으로 지원후 (여기는 절대 안 떨어질 만큼 점수가 남았었다.) 나머지 두 개의 대학은 내가 원하는 의대로 상향 지원했다. 결과는 의대 낙방.


2005년, 나는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사하던 황우석 박사와 같은 연구를 하는 신생학과 (내가 2회 졸업생이다.) 전남대학교 생명 과학 기술학부의 대학생이 되었고, 가고 싶었던 의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공부에서 아주 손을 놓았다. 대학 1학년 때는 시험지를 백지로 내고서도 패기 넘치게 나오기도 했고, F 도 여럿이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대학 2학년이 돼서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어 졌다. 공부를 하자. ‘전공 공부를 한 학기 동안 죽기 살기로 열심히 한 뒤에 그래도 이 공부가 재미없으면 과감하게 때려치우자! 정말 내가 하고 싶어 하는 다른 것을 찾아보자.’ 다짐하고 미친 듯이 전공 공부를 시작했다. 결과는 성공적. 전부 A, A+, A-, 딱 한과목만 B+을 맞는 2학년 1학기를 보냈다. 그런데 그렇게 미친 듯이 공부를 했음에도 전공 공부는 여전히 너무 재미가 없었다. 일례로 우리 학부에는 유전자 변형이 주를 이루는 학문이 많았는데, 이 과목은 실험실에서 실험도 해야만 점수를 받을 수 있는 그런 과목이었다. 번식이 빠르고 DNA 사이즈가 커서 형질을 변형시키는데 최적화된 초파리를 이용해 연구하는 한 실험실의 얘기다. 초파리의 DNA를 변경해서 날개가 여덟 쌍 달린 초파리도 만들어내고, 눈이 파란 초파리도 만들어내고, 다리가 없는 초파리도 만들어 내고.... 등등 마치 창조주가 된 것만 같은 그런 연구들을 하는 실험실이었다. 그 실험실은 폐쇄도 잘 되어 있고 에어커튼을 문마다 몇 겹씩 해놓을 정도로 철저히 통제되고 있었는데 이유인즉슨, 유전형질이 변형된 생물체가 혹여라도 실험실 공간을 이탈해 세상으로 나간다면 생태계를 교란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실험실에서 실험을 하다가 초파리가 실험 박스 공간을 벗어나기라도 하면 그 배울만큼 배운 박사님들과 실험실의 학부생들 너나 할 것 없이 열댓 명이 일어나 그 초파리 한 마리 잡겠다고 박수를 박수를 쳐대곤 했었다. 나는 학부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 길은 내 적성이 아님을 느꼈다. 때마침 그때,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대국민 사기 사건까지 터졌다. 심란했다. 멀쩡한 생명체의 DNA를 바꿔가면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유전자를 현미경으로 몇천 배씩 확대해가며 내가 보내고 있는 이 시간들이 허무하게만 느껴졌다. 세상을 바꿀 힘을 키워가는 시간이 아닌 것만 같았다. 때려치우자, 당장.


나는 2학년 1학기 성적표를 당당하게 들고 엄마께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렸다.


" 엄마 나 이번 학기 학점 정말 잘 맞았는데 대학은 아무래도 때려치우는 게 좋겠어요. 내 길이 아닌 것 같아. 나는 스스로 나아가라는 내 이름처럼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향해 나아갈래."


엄마는 단호했다. "네가 하고 싶은 건 뭐든지 하되 대학은 졸업하거라,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 날부터 이틀 밤을 지새우며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생각했다. 나는 책 읽는 것을 좋아했고 좋은 시를 읽으며 울었을 만큼 감정이 풍부했다. 중고등학생 때는 늦게까지 공부하며 라디오를 듣는 게 유일한 행복이었고,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 뽑히기도 여러 번이었다. 가수 신화의 김동완 씨가 밤 10시 텐텐클럽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디제이를 했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내 이름에 얽힌 에피소드를 사연으로 적어보네 당첨이 되어 김동완 씨와 통화한 적도 있었다. 그래, 나는 글 쓰는 걸 좋아했어. 이번 기회에 작가가 돼보면 어떨까? 기왕이면 방송국에서 일하면서 유명한 사람들 많이 만나면 좋겠다! 그리하여 나는 밤낮없이 방송작가 되는 법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우리 지역에 딱 하나, 방송작가 아카데미가 있었다. 그런데 웬걸... 내가 그 아카데미를 검색해서 찾아내기 바로 하루 전날 이미 다음 기수 수강생 마감이 끝나버린 것이었다. 방송작가가 되고 싶은 내 절절한 사연을 글로 써서 작가 아카데미에서 꼭 공부하고 싶다고 담당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진심은 통하는 것인지 방송작가 아카데미에서 연락이 왔다. 이런 적 없었는데 한자리 더 늘려줄 테니 와서 배우라고. 그렇게 아카데미 수강생이 되었다. 내가 너무나 하고 싶었던 일이어서 그랬는지 과제 하나하나 밤을 새우며 해도 즐거웠고 공부하는 게 그렇게 신날수가 없었다. 얼마나 열심히 했던지 날마다 수업 한 시간 전에 강의실에 가서 선생님을 기다리고 과제도 다른 학생들보다 대여섯 배는 많은 분량을 해서 갔었다. 당시 같이 수업 들었던 내 또래 다른 대학교 국문학과 아카데미 동기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특유의 글쟁이 분위기가 있었고 색다른 글을 썼으며 정말 글 쓰는 실력이 뛰어나서 선생님 눈에 띄었다. 그 친구 못지않게 나도 선생님 눈에 띄었는데, 나는 너무 심하게 열심히 해대서 선생님 눈에 띄었었다. 그 친구의 이름을 훗날 나는 신춘문예 당선자 리스트에서 보았다. 아무튼 이쯤에서 각설하고. 그렇게 석 달 방학 동안 이어진 아카데미가 끝났다. 아카데미가 끝날 무렵 선생님께서 나를 따로 부르셨다.


“스스나, 네가 실력으로 1등 작가는 아니지만 열심히 하는 그 끈기로는 이 아카데미 첫 수강생부터 누구도 이기지 못할 거야. 네가 일등이었어. 내가 너를 KBS 광주방송국에 막내 작가로 추천하고 싶구나.”


그렇게 내 방송작가 시절이 시작되었다.


방송작가를 하는 동안은 참 즐거웠다.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많은 곳들을 다녔으며, 좋은 경험들을 수도 없이 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방송작가는 참으로 고된 직업이었다. 좋은 말로는 프리랜서였지만 (그래서 대학을 다니면서 일할 수 있었다.) 쉽게 말해 비정규직이었고, 챙겨야 할 잡다한 일이 많았다. 어느 한날 작가 일에 좀 지쳐있는 내게, 방송 아카데미 때 나의 선생님이었던 그녀가 때맞춰 문자를 보내줬다.


"죽기 전까지, 내 이름으로 된 명함 4장은 가져봐야지 않겠어? 나를, 내 생을 설명해줄 title이 그 정도도 안된다는 건... 너무 억울하잖아. 나중에 꼬부랑 할머니 돼서 아... 나 참 재미없게 살았구나~ 후회하지 않으려면, 스나야, 우리 열심히 살자!"


내가 참으로 좋아했던.. 오뉴월 청포도 같은 싱그러움을 온몸으로 풍겨대던... 처음으로 '아, 이 여자, 이 사람 닮고 싶어!' 생각하게 만들었던.. 전직 방송작가이자, 교수이자, 방송 아카데미 설립자였던 그녀가 스물두 살, 치기 어린 열정만 가득했던 나에게 해준 그 얘기에 나는 다짐했다. 힘들어도 작가 3년은 해보자. 3년 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그 3년, 내 인생 아까워 그만두지 못할 만큼의 긴 시간은 아니니, 과감하게 던지고 나오자!


그녀의 이 한마디는 안정적인 현실과 새로운 출발이라는 선택의 기로에 서서 우왕좌왕 거릴 때마다 더없이 훌륭한 나침반이 돼주었다. 나는 방송 작가 3년 차가 되었던 2010년, 드디어 대학을 졸업했다. 방송작가 일이 가장 바빴을 때 한 학기 휴학을 했던지라 원래 예정보다 졸업이 반학기 늦어졌지만, 결국 나는 엄마와의 약속을 지켰다. 작가 3년 차이자 대학 졸업까지 마친 2010년, 나는 다짐했다. 자, 이제 작가를 관두자.


2007년 꽃 피던 이맘때, 스물두 살의 나는 어쩌면 남은 인생을 통째로 바꿔버리게 될 지도 모르는 그런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서 겁도 없이 당차게 당돌하게 "대학을 관두게 된다 해도 내가 하고픈 일을 해야겠어" 했더랬다. 나는 아직 어리니까. 젊으니까. 한번 사는 인생이니까-
다이어리 한 구석에 꾹꾹 눌러쓴 나와의 약속.... 중간에 아무리 힘이 들지라도, 일이 너무나 고달파진대도 딱 3년은!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자..! 내가 선택한 일이니까. 만약 내게 이 일에 대한 재능이 있다면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라면 어느 정도 인정받고 있지 않겠어? 그리고 만약, 내가 이 일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때 가서 멈춰도 늦지 않으니까. 5년, 10년이라는 시간은 내 청춘 아까워 무슨 일이든 절대 그만둘 수 없게 만드는 힘을 가지지만 3년이란 시간은 아니다 싶을 때 과감히 포기할 수 있을 만큼 짧다면 짧은 시간이니까. 그때 다시 뭐든 또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정말 3년이 흘렀다. 그간의 3년은 혼란스러웠지만 즐거웠다. 참으로 즐거웠다고 말하고 싶다. 몰랐던 것을 참 많이 알았고, 못 보던 것들을 참 많이 접했고, 못 했던 것들을 다 해볼 수 있었다. 내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했고 노력한 만큼 인정받았다. 2010년 3월의 나는 다시 또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3년의 힘은 생각보다 어마어마했고, 마음을 결정하는 것은 그때보다 30배는 더 힘들어진 느낌이다. 이미 정답이 나와있는 문제 이건만 뭐가 이렇게 어려운 건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보자. 나는 아직 어리니까. 젊으니까. 한번 사는 인생이니까- 3년이 흐른 뒤 후회하지 않으려면...

2010년 3월 20일의 일기



작가를 관두는 일을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다. 함께 일했던 스태프들과 부장님, 과장님 등등 회사의 상사들까지 그만두지 말라며 만류했다. 내가 일을 꽤 잘했던 것만 같아 만류하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오히려 손뼉 칠 때 떠나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홀가분해졌다. 가족들은 네 뜻대로 하라며 응원해줬지만, 사실 가족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사람은 '너 이제 20대 중반이야 뭘 하려고?' 하는 눈빛을 보냈다. 한국 나이로 내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리디 어린데 그땐 왜 그렇게 나이만 먹은 것만 같았는지. 나는 자꾸 어디로든 떠나고만 싶어 졌다. 누구도 나를 알지 못하는 완전히 새로운 미지의 세상으로.


그날 저녁 또 밤잠을 못 이루며 워킹 홀리데이 프로그램을 검색했다. 마침 가장 가까운 시일 안에 떠날 수 있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뉴질랜드였다. 그때까지 나는 사실 뉴질랜드가 어디 즈음에 붙어있는 나라인지도 몰랐다. 나는 철저하게 이과였기 때문에 세계지리에 대해서는 정말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뉴질랜드가 어떤 나라인지 어떤 언어를 쓰는지 계절은 어떤지...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그저 어디든지 가고 싶은 마음에 뉴질랜드 워킹 홀리데이 프로그램에 지원했다. 제발 뽑히게 해주세요, 제발요! 하는 마음으로.


이천 명의 2010년 뉴질랜드 워킹 홀리데이 합격자 결과가 발표됐고, 나는 당당히 합격자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자, 이제 뉴질랜드로 떠날 일만 남았다. 방송국에 떠나는 날짜를 통보하고 함께 일했던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내가 참 어린 나이에 작가로 취직했기 때문에 우리 방송국에 내 또래가 많지 않았는데, 방송국 미술팀에 친하게 지냈던 동갑내기 친구가 하나 있었다. 그녀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며 그간의 스토리를 들려주고 나는 뉴질랜드로 떠나노라 말했다. 그러자 느닷없이 그녀는 “스스나 우리 교회 친구 중에 뉴질랜드에서 온 사람 있는데 만나볼래?” 했다.


세상에나. 지방의 광주 바닥에서 뉴질랜드에서 온 사람을 만나다니! 이거 엄청난 도움이 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흔쾌히 OK 했고 만남은 생각보다 금방 이뤄졌다. 그때 광주에서 만났던 친구의 이름은 이름부터 거룩한 바로 글로리아 Gloria Kim이다. 글로리아는 뉴질랜드에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내 말을 듣더니 원한다면 본인의 집에서 홈스테이 해도 된다고 했다. 본인이 한국에 나와있기 때문에 집에 방이 하나 비어 있는데, 본인이 엄마께 말씀드려 보겠다는 것. 단, 약속 하나만 하자고 했다.


“언니, 뉴질랜드에 가면 주일에는 꼭 교회를 나가줬으면 좋겠어”


어차피 뉴질랜드에서의 삶이라는 것이 아직 정해진 게 하나도 없었으므로, ‘교회에 가서 친구나 사귀어야겠다’라는 마음에 흔쾌히 “그럼 그럼” 하고 대답해버렸다. 그렇게 나는 뉴질랜드에 왔다.


2010년 6월 23일에 한국 인천공항을 떠나 두 나라를 Stop- Over 한 뒤, 뉴질랜드에 도착한 날은 2010년 6월 26일. 토요일이었다. 토요일 하루 시차 적응을 하고 뉴질랜드에 온 둘째 날부터 나는 글로리아의 어머니를 따라 한우리교회에 출석했다. 그 후 현재까지 한주도 빠짐없이 한우리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내가 뉴질랜드에 도착하기 전, 글로리아는 한우리교회의 친구 두 명에게 ‘이스스나’라는 언니가 뉴질랜드에 갈 거라고 잘 챙겨주라고 미리 연락도 해뒀다고 한다. 그 두 명이 한우리교회 담임목사이신 남우택 목사님의 둘째 딸 예린이와 지금 나의 남편 손동욱 씨다. 정말 믿기지 않는 인연이다. 이제와 돌이켜 생각해보니 뉴질랜드에 오기까지 나의 모든 순간순간이 하나님 은혜다.

하나님께서 나를 한국에서 건져내신 것 같다.


' 스스나 이제 한국을 떠나서 다시 내게 돌아오너라. 너 스스로 내게 나아오너라.'


나의 이름 뜻 스스로 나아가라는 아마도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라’였나 보다.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하나님께 받은 것처럼, 오늘 나는 내 인생을 돌아보며 하나님께로부터 내 이름 뜻을 새롭게 받았다. 동욱 씨와 나 사이에서 태어난 소중한 주님의 아들 엘림이는 내가 큐티하는 두 시간 반 동안 깨지 않고 자고 있다. 이 또한 하나님 은혜다. 엄마가 이렇게 긴 글을 적는데 안 깨고 기다려주다니 세상에서 가장 착한 아가인 것 같다.


2010년 6월 23일, 당대 최고의 커뮤니티였던 싸이월드에 써놓았던 일기.


엄마가 성경묵상을 쓰는 두시간 반 동안 깨지않고 통잠자준 착한 아가 엘림이
작가 아카데미의 선생님이었던 그녀의 말이 이루어지기라도 한걸까... 뉴질랜드에 와서 나는 아가 엘림이를 낳기 전까지 네개의 명함을 소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