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로봇은 인간을 구할 수 있을까?

소설 <천 개의 파랑>과 iMAGINATION WEEK 2021

by 봄의파랑
그래도 우리가 불행한 미래를 상상하기 때문에 불행을 피할 수 있다고 믿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미래는 상상보다 늘 나을 거예요.
- 천선란, 천 개의 파랑


사실 나는 과학 기술의 발전과 그로 인해 도래할 미래 사회에 상당히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로봇이니, 자동화니, 인공지능이니 하는 것들은 늘 디스토피아적 이미지를 불러일으켰고 나아가선 인간성을 위협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채도라곤 존재하지 않는 회색 빛의 도시나 표정 없는 사람들, 감정 없는 교류 따위를 연상시켰고 그런 변화는 최대한 미뤄야 한다고 믿어왔다. 아니면 이미 변화가 시작됐다는 걸 알면서도 애써 모른 척하길 택했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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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선란의 장편소설 <천 개의 파랑>은 SF 소설로 빠르게 달릴 줄 밖에 모르는 경주마 투데이와 그 투데이의 휴머노이드 기수인 콜리, 사고로 버려질 뻔한 콜리를 구해온 고등학생 연재를 주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서로 다른 쓸모를 가진 로봇이 등장하는 미래 사회를 그려내고 있지만 그 사회를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아픔과 슬픔, 그리고 오랜 시간 쌓여온 복잡한 감정들이 치유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이 소설 속의 로봇, 콜리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그 누구보다 섬세하게 인간의 상처를 어루만져준다.


행복만이 그리움을 이길 수 있다고 했잖아요. 아주 느리게 하루의 행복을 쌓아 가다 보면 현재의 시간이, 언젠가 멈춘 시간을 아주 천천히 흐르게 할 거예요.
- 천선란, 천 개의 파랑


소설 후반부부터는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슬프라고 쓴 소설이 아닌 것은 분명한데, 이상하게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까지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등장인물들의 마음속에 난 상처가 남 얘기 같지 않고, 또 그 상처를 치유해주는 콜리의 말들이 내게도 따뜻하게 와 닿았기 때문에 그만큼의 온기가 눈물의 형태로 터져 나온 것이 아닐까? 인간이 만들어낸, 감정 없는 휴머노이드 로봇이 인간을 진심으로 위로하는 그 아이러니가 내 마음속에 이상한 희망의 싹을 틔워냈다. 어쩌면 로봇이 인간을 구해줄지도 모르겠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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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에는 학교에서 주최한 iMAGINATION WEEK가 열렸다. 정식 학기 시작 전에 같은 졸업반에 있는 모든 학생이 필수로 참여해야 하는 과정으로, 주제는 해마다 바뀐다. 올해는 '2050년의 세계'를 주제로 2050년의 세계가 어떻게 변할지 예상하고, 그중 사회에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될 주제를 고른 후, 그 문제를 어떻게 창의적으로 해결할 것인지 팀별로 발표를 해야 했다. 팀은 프랑스인 학생들과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국제 학생들을 모두 섞어 임의로 배정됐으며 아쉽게도 올해는 100% 온라인으로 진행되었다. 중간중간에는 전체 800명가량의 학생을 대상으로 한 강연들이 진행되었으며 철학, 생명윤리, 정보통신 같은 다양한 분야 전문가들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다. 5일간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빽빽하게 이어지는 콘퍼런스, 워크숍, 개별 조모임, 프로젝트 등을 모두 소화해야 하는 바쁜 일정이었지만 서로 다른 성장배경을 가진 친구들을 만나 같은 주제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게 흥미로웠다. 그리고 무에서 유를, 산발적인 아이디어만 있던 상태에서 하나의 결과물을 탄생시키는 과정이 성취감을 주었다.


모두가 생각한 미래의 문제점은 다 어느 정도는 예상 가능한 범위의 이야기였다. 그만큼 뻔하고 한편으로는 인류에게 발등에 불 떨어진 것과 같은 이야기. 인터넷과 소셜 네트워크의 발달이 야기한 인간 소외, 갈수록 심각해지는 환경 문제, 포퓰리즘과 퇴보하는 이민정책, 인구의 노령화, 개인 정보의 보안 문제 등이 끊임없이 화두에 올랐다. 그중 조마다 정한 한 가지 주제로 미래주의적인 관점에서 약간의 상상력을 더해 설득력 있게 프로젝트를 설명하는 것이 이 주의 목표였다. 우리 조는 오랜 상의 끝에 사이버 폭력(Cyberbullying) 문제로 범위를 좁혔다.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데 하필 읽고 있는 책이 <천 개의 파랑>이어서 자꾸만 다정한 로봇을 만들어내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결국에는 팀원들을 설득해 심리 상담을 도와주는 테라피스트 기능이 탑재된 로봇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한 친구가 웃으며 '너 진짜 로봇이 하고 싶구나?'라고 말해서 모두 웃음이 터졌던 건 작은 비하인드 스토리.


조별로 과제를 제출한 후, 학생들과 심사위원들의 심사를 통해 치열한 예선전을 거쳐 5개의 작품이 최종심에 올랐다.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이나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아이디어들이 꽤나 새롭고 신선했다. 첨단 기술이 야기하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더 발전된 기술을 사용하거나 지난 세기 동안 인간이 저질러놓은 일들을 수습하기 위해 결국은 인간의 집단 지성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 다소 아이러니하게 여겨졌으나 한편으로는 그래서 비관적인 상황에서도 세계가 이렇게 끊임없이 위기와 기회의 상황을 반복하며 돌아가는 거구나 싶기도 했다.


인류가 더 나은 미래에 살게 될까? 솔직한 마음으로는 종말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답하고 싶지만 지금은 그래도 우리가 무언가를 바꿀 수 있으리라는 믿음, 그 믿음으로 미래를 낙관하는 일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늘 현재에 닥친 일만 해결하기도 바쁘다 하며 살아왔고 특히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나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일이 아니면 알 바 아니다 넘기고 살았지만 앞으로는 이 땅에 사는 사람으로서의 책임감을 가지고 인류 공동의 문제에도 조금 시선을 두어봐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 한 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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