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들 - 메일링 겨울호 8편
일요일 오후. 오랜만에 늘 하던 오전 필라테스 수업을 마치고 근처 오십 미터 거리의 카페에 갔다. 고작 다섯 평 정도일 것 같은 작은 실내 공간에 나무 의자와 원형 테이블 몇 개가 놓인 협소한 테라스가 전부인 카페지만 솔직히 아몬드 우유로 만든 카푸치노와 플랫화이트가 파리에서 손꼽게 맛있기 때문에 발걸음이 자주 향하는 곳이다. 오늘은 역시나 햇살이 따스해서인지 테라스가 바글바글했지만, 이 카페의 좋은 점은 역시 사람이 금방 빠지고 또 금방 채워진다는 것이다. 커피를 주문하는 새 탐내던 테라스 자리가 비었길래 한자리 차지하고 앉아 대충 구깃구깃 들고 온 노트를 꺼내 들었다. 글을 쓰긴 써야 한다고 생각하며 노트에 아무 생각이나 끄적이기 시작했다. 해가 서서히 내가 있는 곳으로 넘어오면서 그 온기가 온 얼굴에 쏟아졌다. 최고의 행복. 이런 작은 순간이 너무, 너무너무 좋아서 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난 아무래도 해 뜨면 비키니 입고 공원에 누워있는 인간으로 거듭날 날이 머지않은 듯하다.
파리를 여전히 사랑하긴 하지만,
그 사랑은 영원이 아니고,
나는 그걸 가끔 너무 잘 알고,
때로는 이곳이 질린다고 생각해.
예전에는 파리에 사는 게 너무 좋아서, 나는 단지 이 도시를 떠나서 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해외생활을 이어나가는 동기가 됐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정도 이유로는 해외 생활을 버티기가 힘들어졌고,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사랑 이런 것들이 지독하게 그리워졌기 때문에 마음이 약해졌다. 3년이 지난 다음에야 왜 여기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스스로 되물어야 하는 순간이 많아졌고 나는 내가 정확히 나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곳에서 이러고 있는 게 맞는지 의심했다. 남의 가정이 완성되어 가는 걸 볼 때마다, ‘솔직히 네가 언제부터 안정적인 가정을 갖는 게 꿈이었냐’ 생각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론가 나아가는데 나만 여전히 같은 곳에 고여있다는 생각을 떨쳐 내기가 힘들었다. 무슨 대단한 인물이 되겠다고 혹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러고 있나 싶다가도.
어쩌다 만난 동생이 에디터가 꿈이라고 하면 온 성의를 다해 도와주고 싶고, 유학 관련 블로그에 달린 댓글 하나에도 마음이 쓰이는 걸 보면 나는 자꾸 내가 더 잘 돼서 꿈을 가진 여자들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저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잡지사에서 일하면서 수많은 여성 선배들을 보고 자랐기도 하고, 프랑스에 살면서는 더더욱 커리어가 탄탄한 여성 임원들이나 CEO들을 봐왔기 때문에, 그리고 내 인생 어느 지점마다 그들이 내게 아주 큰 동기부여가 되어주었기 때문에 나도 최대로 내 인생을 빛내서 다른 사람들의 길을 비춰주고 싶다. 나는 그게 사실은 내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그 소신을 유지하는 게 여전히 어렵지만.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미 이 나라와 지독하게 얽혔기 때문에 애매하게 발을 빼버리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는 것이다. 그 끝이 어디든 이제 끝까지 가봐야 하는 상태랄까. 뭐 경제학에서 한 대안을 선택할 때 매몰비용은 고려하면 안 된다고 하지만, 학비와 이 몇 년간의 치열함과 피땀 눈물… 등등을 따지면 어중이떠중이로 돌아가기는 너무 아깝단 말이지. 솔직히 말하면 어떤 순간에 진짜 한국이 가고 싶어 지더라도 최소한 프랑스가 본사인 회사에서 몇 년은 버티고 한국에서 지사장 정도는 해야 하지 않나… 아무튼 굵직한 자리 하나 정도는 차지할 짬이 될 때 가는 게 맞는 것 같다. 나는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사실 나는 아예 안 하면 안 했지 한번 하면 끝을 봐야 하는 타입이고, 이럴 걸 알아서 석사 시작하기 전에 망설인 것도 사실이지만 어째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을?
결론 : 버티는 게 답임. 하지만 최대한 즐겁고 아름답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