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리고 비가 오는 게 아무리 겨울 파리의 기본값이라고 해도 그 주는 유난히 일주일 내내 날씨가 궂었다. 참다 참다못해 금요일에 미술관으로 도피를 했다. 벼르고 벼르던 마크 로스코 전시를 보기 좋은 때다 -라는 판단도 물론 있었지만 올림픽 때문에 집에서 제일 가까운 지하철 노선이 2주 간 공사에 들어가기 때문에 지금이 아니면 전시 관람은 2주 후로 밀린다는 이유도 있었다. 특히 마크 로스코 전시가 열리는 퐁다시옹 루이뷔통(Fondation Louis Vuitton)은 파리의 살짝 외곽에 있기도 하고 또 우리 집과는 정반대 편에 있기 때문에 찾아가려면 상당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파리에 살면서 가장 혜택을 누린다고 느끼는 점은 미술관과 박물관이 많다는 것과 테마에 맞춰 작품을 다양한 방식으로 큐레이팅한 전시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레 지구에 위치한 피카소 박물관에서는 피카소의 사후 50주년을 추모하기 위한 다른 현대 작가의 전시, 색채의 대가 폴 스미스가 큐레이팅한 피카소 작품을 모아둔 전시, 그리고 피카소가 작품활동하던 시절 찍어둔 사진들을 모아둔 전시 등 같은 피카소 작품으로 여러 가지 색다른 영감을 주는 전시를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한 미술관을 여러 번 찾아가는 것이 지루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파리 살면서 알게 됐다.
특히 겨울은 전시를 보러 다니기 가장 좋은 계절이다. 사실 바깥 공원에 누워만 있어도 행복한 여름에는 미술관으로 발걸음이 잘 안 가는데 반해 춥고 흐리고 음울한 계절에는 나도 모르게 실내에서 할 수 있는 활동을 찾게 된다. 그래서 친구를 만날 때도 뭐 할래? 물어보면 어디 미술관에서 무슨 전시하던데 보러 갈까? 가 자연스레 답으로 나온다. 파리에 살면 미술관들의 공식 계정을 팔로우하고 전시회 관련 뉴스를 팔로우하는 게 흔한 일이 된다. 그리고 전시를 향유하는 성별이나 나이대도 다양한 편이라 미술관 관람이 어떤 특정 계층이나 세대의 전유물이 아닌, 모두의 일상에 녹아있다는 점이 파리를 예술의 도시로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다. 실제로 멋지게 차려입고 전시회를 찾아오는 중장년층을 보면 저렇게 나이 들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새로운 감각을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배우려는 자세 같은 것.
이번 마크 로스코 전시는 1999년 파리의 현대 미술 박물관(Musé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 이후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것으로 총 115개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초기 인물화부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추상화까지 작가의 커리어 전체를 시대 순서에 따라 보여주고 있다. 로스코 하면 떠오르는 추상화 외에 다른 작품이 있다는 것은 나도 이번 전시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되었다. 대표작을 완성하기까지 다양한 실험을 거쳤던 걸 보며 위대한 작가라도 무언가 한 방에 완성되는 것은 없다는 걸 깨닫는다. 로스코가 추상적 표현주의로의 전환을 시도한 건 1946년으로 초기에는 Multi-forms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색채를 가진 덩어리들이 캔버스 위에 균형을 맞춰 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점차적으로 덩어리 개수가 줄어들고 작품의 공간 구성 역시 점차 로스코 작품의 전형적인 형태로 변해간다. 초창기의 과도기적 작품들은 주로 원색을 써 색채가 화려했고 덕분에 전시 공간이 화사하게 채워졌다. 흐린 날이 계속되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은 상태라 이 공간에 있기만 해도 밝은 에너지를 받는 것 같아 한동안 머무르며 작품들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물론 모든 작품이 이렇게 화사한 색채로 구성된 건 아니다. 미술관의 층을 올라갈수록(후기로 갈수록) 어두운 색채와 톤을 가진 작품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는 어두운 톤과 약한 대비를 선호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후기의 몇몇 작품들에서 찾아볼 수 있듯) 밝고 화려한 색채를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작가의 후기 작품 시리즈이자 검정과 회색이 주를 이루는 Black and Grey 시리즈를 단순하게 그의 우울과 자살의 전조로 해석하는 것은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이다. Black and Grey 시리즈 작품들을 볼 수 있는 전시관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알베르토 지아코메티 Alberto Giacometti의 대형 조각품도 함께 볼 수 있었는데, 원래 로스코가 UNESCO의 의뢰를 받아 기획했던 공간의 분위기를 조성했다고 한다.
로스코식 탐구의 영속성, 관람객과 작품을 통해 무언의 대화를 하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그저 색채를 다루는 사람(Colorist)으로 평가받는 것에 대한 거부감 등은 로스코의 작품들에 대한 다채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다. 전시를 보며 로스코의 말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미술을 음악이나 시만큼 슬픔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매개체로 만들고 싶어 화가가 됐다는 말이었다. 그만큼 작품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데 진심이었다는 게 늘 로스코의 작품을 예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만 치부한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들게 했다.
이번 전시는 오랜만에 혼자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면서 봤는데 내가 원하는 만큼 천천히 오롯이 작품을 감상할 수 있어 더 좋았다. 친구랑 보면 전시에 대해 친구랑 이야기를 나누고 감상평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라면 혼자 있으니까 어떤 시간의 압박 없이 작품과 나, 세상에 둘만 남은 느낌이 들어서 몰입이 더 쉽게 됐다. 그리고 오디오 가이드의 설명을 통해 작품을 보는 관점에 대해서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특히 추상화라 모르는 상태로 봤으면 그저 예쁘고 색을 잘 썼다 정도에서 끝났을 감상이 작가의 의도와 해석이 더해져 좀 더 풍부해졌다.
미술관에 어떤 의도나 목적을 갖고 간 적은 없다. 뭔가를 더 배우거나 느끼자고 가는 건 아니지만 다녀오면 항상 늘 긍정적인 영향을 받고 온다. 단순히 심미적인 영감이든 감정적인 위로든 아니면 번뜩이는 지적 영감이든 말이다. 삶의 의미 같은 거창한 이유를 찾는 대신 그냥 좀 더 나은 일상을 만드는 데 집중하기 위해서는 미술관 같은 곳을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고 그것 또한 삶의 예술성을 실천하는 일이 아닌가 한다.
참고
https://www.fondationlouisvuitton.fr/en/events/mark-rothk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