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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의파랑 Mar 21. 2019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A Paris

에디터로 살아왔던 시절 때문인지 늘 각 잡고 완성된 글을 쓰려고 하는 습관이 있어 쓸만한 주제를 잡고 그것에 대해 '본격적으로' 써 내려가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뭔가를 쓰고 싶을 때조차 정작 시작하기도 전에 미리 나가떨어져 버리는 일이 태반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버린 주제가 수도 없이 많다. 이와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오늘은 약간 별 거 아닌 시시한 것들로 글을 채워보려고 한다. 저녁 먹으면서 로제 와인을 홀짝 거렸더니 알코올의 기운으로 약간 횡설수설일 수 있음 주의. 나중에 퇴고하기로 하고~ 

해가 지는 풍경은 늘 영감을 준다. 

글을 쓰고 싶어 지는 기분이 있다. 무엇에 영향을 받는지 정확히 정의할 순 없지만 마음속에서 넘쳐나려고 하는 무엇인가를 쏟아부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 글을 쓰고 싶어 진다. 한번 덜어내야 조금이라도 가벼워질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겠지. 오늘은 저녁 여섯 시 즈음에 장을 보러 나갔다. 이 시간에 밖에 나온 건 꽤 오랜만인데 분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하늘이 너무 예뻐서 장 보는 건 미루고 무작정 집 앞 공원으로 향했다. 이전에 언급했듯 집 앞 공원에는 큰 호수가 있는데, 수면 위에 비치는 동네의 풍경이 너무 예뻐서 잠시 감상에 젖어 있었다. 늘 그렇듯 한순간에 센티멘탈. 그리고 그때 마침 친구 Y와 카톡을 하고 있었는데, '삶은 어디에서나 그게 그거다'라는 주제로 한창 얘기를 했다. 우리 둘의 주요 논지는 모든 게 완벽할 수는 없고, 하나가 갖춰지면 다른 하나가 삐그덕 대기 때문에 우린 계속 불만족스러운 상태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토록 꿈꿔왔던 파리에 와서 유학 생활을 하게 되며 느낀 건, 물론 한국에서의 삶과 비교해 정신적으로 풍요로워진 것은 맞지만 물질적 빈곤과 부담으로 말미암은 정신적인 고통 또한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어차피 돈은 또 벌면 되니까' 하고 쉽게 쉽게 소비를 했다면, 그리고 그걸 스트레스를 푸는 하나의 탈출구로 생각했다면, 여기서는 생활에 필요한 무언가를 살 때조차 '이게 진짜 필요한 것일까'를 두 번, 세 번 고민하고 사게 되기 때문에 그 지점에서 약간의 비참함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조금 더 치열해져 버린 나의 삶이, 진짜 삶 그 자체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내가 Y에게 메시지를 보냈듯, <그래도 여기서는 내가 살아있다는 걸 느껴. 진짜 삶 말이야.> 인생이 좀 더 어렵게 느껴지긴 하지만, 아무튼 지금은 그래도 영혼이 오롯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게 내겐 꽤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니까, 결국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이냐는 온전히 개인의 것. 

동네에도 슬슬 봄이 오고 있다. 흐린 날씨에도 묵묵히 할 일을 다하는 봄꽃들의 생명력은 늘 놀랍다. 

파리의 날씨는 여전히 춥고 흐린데, 3월 20일이 되도록 봄이 완연하지 않다는 사실에 절망하다가 문득 봄을 기다리는 스스로가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일을 하면서 바쁘게 살 때는 문득 정신 차려보면 '봄이구나, 어느새 봄이 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지금은 주변을 둘러볼 시간이 생기다 보니 봄이 오길 자연스레 기다리게 됐다. 길을 걸으면서 '오늘은 꽃이 조금 더 피었네-' 하는 감상도 덧붙일 정도의 여유가 생겼달까? 예전에는 늘 촬영 가는 길에 차 안에서 '와, 벌써 꽃이 이만큼 폈네-'라고 놀랐던 것 같은데. 같은 맥락에서 오늘 새삼스럽게 느낀 사실은, 월간지 마감과 연을 끊은 지 이제 겨우 한 달이지만 벌써 마감이 너무 다른 세계 일처럼 느껴진다는 거다. 20일 경이면 한창 패션지들이 릴리즈 될 시점인데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잡지 표지가 누구고 어떤 잡지에 어떤 연예인이 나온다는 글을 보고 나서야 '아, 4월호 잡지 나올 때가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 약간의 해방감을 느꼈다. 이런 말 하게 되어서 유감인데 마감 없는 삶, 행복해. 

오랜만에 커튼을 다 치고 잤더니 너무 일어나기 싫었던 어느 날 아침. 

어느 날은 수업 시간에 프랑스의 비주 문화(상대와 인사할 때 양볼에 쪽쪽하는 것!)에 대해 얘기를 하다가 프랑스에서 비주를 하는 건 매우 일상적인 일이지만, 정작 포옹을 하거나 끌어안는 건 자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포옹을 통해 사람들과 에너지를 나누는 게 매우 동양적인 것이라고 했다. 프랑스에서 껴안는 건 엄청 친밀한 행위라고. 어쨌든 비주를 할 때도 서로 딱 붙는 게 아니고, 일정 거리는 유지한 채 쪽쪽하는 거긴 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영 틀린 말은 아니다. 아무튼 포옹 성애자인 나는 약간 실망했다. 친구들이랑 안으면 위로받는 기분이 들어서 좋은데! 그리고 잘 모르는 사이라도 하더라도 끌어안는 게 볼에 뽀뽀 쪽쪽하는 거보다 쉽지 않습니까? 문화 차이는 늘 신선하다. 말 나온 김에 누군가에게 잠시라도 안겨있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생각만 해도 힘나는데. 가장 친한 친구들이랑 서로 힘들다는 얘기를 할 때 자주 하는 말이 '얼른 만나서 안아줘야 되는데!' 였을 정도다. 안아줄 친구 다 서울에 놓고 와서 서글프다. 정말, 여러분, 세상을 살아가는 데 적정량의 포옹은 꼭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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