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헛한 심곡을 추스르고 회의실에 와보니 김한겸 부장이 내 자리 앞에 서있었다.
“부장님, 오셨어요.”
“네, 방금 왔어요. 작업은 잘 돼가나요?”
“요즘 트렌드하고 해외 사무소에서 수행했던 프로젝트 기반으로 토픽을 뽑긴 했는데 잘 모르겠어요. 워낙 현대통신 쪽 정보가 없어서요.”
“그렇죠? 대한통신이나 온세통신처럼 이전에 했던 프로젝트라도 있으면 도움이 좀 될 텐데 말이에요. 유형식 차장은 좀 어떤가요? 최선을 다해 적응하고 있나요?”
“네. 그야 뭐…”
김 부장은 상황이 뻔히 보인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컨설팅 경험이 없어서 많이 도와주셔야 할 거예요. 애티튜드는 좋지만 애티튜드로 일하는 건 아니니까요. 지
금까지 결과물 좀 볼까요?”
“그게, 아직 조금 더 손을 봐야 할 텐데요.”
아직 유 차장이 작업하던 장표들은 손보지 못했다. 어디 내놓기도 창피한 수준이었다.
“괜찮아요. 디테일은 무시하시고, 뽑은 토픽 하고 메시지 위주로 먼저 보죠.”
나는 마지못해 유형식 차장이 보내줬던 장표들 그대로 김 부장에 보여줬다. 김한겸 부장은 굳은 표정으로 슬라이드를 훑어 내려갔다. 첫 장표를 한동안 보던 김 부장은 더 이상 볼 필요도 없다 판단했는지 메밀면 삼키듯 후루룩 나머지 장표를 넘겼다.
홧홧한 기운이 안면 가득 올라왔다. 역시나 조금 더 다듬고 보여주는 게 맞았다. 어느새 회의실로 돌아온 유형식 차장도 김한겸 부장을 보고는 도둑걸음으로 다가와 내 옆에 섰다.
“고생들하셨네요.”
“고생이야 성대리가 했죠.”
유 차장이 멋쩍게 웃으며 내 어깨를 툭 쳤다. 김 부장의 냉소는 눈치도 못 챈 채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김 부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 훗하고 웃어버렸다.
“그래요, 수고들 정말 많이 하셨는데, 작업은 처음부터 다시 해야겠어요.”
보완도 아니고 처음부터 다시라. 단순히 작업 완성도가 부족해서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뭐, 따로 논의하신 게 있으신가요?”
내가 물었다.
“오늘 임원회의에서 제안서 방향을 바꾸기로 결정했습니다. 선 제안 정도가 아니라 과감히 투자하는 쪽으로요.”
“투자를 한다고요?”
유 차장이 되물었다. 나한테도 아리송한 말 뿐이었으니 지금쯤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일 거다. 컨설팅은 결국 사람 장사다. 과감한 투자라면 아마도 인력을 더 투입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헌데 상대가 현대통신이라면 우리 쪽에서 아무리 인력을 투입한들 눈하나 꿈쩍할 리 없었다. 우리 인력들 강점이라면 대한통신과 온누리통신 프로젝트 경험이 풍부하다는 점인데 현대통신은 이미 선도 통신업체로 나서 그들을 경쟁사로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해외 인력을 투입하는 건가요?”
“빙고!”
김 부장은 이제야 말이 통한다는 듯 날 향해 손가락 총을 만들며 미소 지었다.
“’ICT 이노베이션 데이’라는 걸 제안할 거예요. 어센트 미국팀과 유럽팀에서 통신사 전문가들 10명 정도를 초빙해서 세미나를 여는 거죠. 버라이즌, AT&T, 보다폰, 오렌지 같은 선도 통신업체에서 최근 진행한 프로젝트를 소개하면서 자연스럽게 현대통신이 관심을 가질만한 토픽을 탐색하는 겁니다. 제가 이메일로 새로 작성한 제안서 초안을 보냈으니 열어 보시죠.”
난 노트북을 가져와 김 부장이 보낸 초안을 프로젝터 화면에 띄웠다. 제안서 초안은 총 12장이었다. 첫 장은 ‘ICT 이노베이션 데이’ 개요, 두 번째 장은 일정, 그리고 나머지 10장은 어센트 글로벌 전문가 이력서였다.
어센트 북미 통신산업 대표 애쉬 헤이우드 사장, 버라이즌 담당 진 에크만 부사장, 보다폰 글로벌 담당 조나단 크레이머 부사장, 차세대 무선통신 시스템 연구소장 제롬 베누와 부사장.
어센트 인트라넷을 검색할 때면 굴지 가는 통신 프로젝트마다 언급되던 어센트 최고 전문가들이었다. 아니, 사실상 통신업계 세계 최고 전문가들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제안서에 담긴 단 10장의 이력서로 어센트가 현대통신과의 관계를 얼마나 중요히 생각하는지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럼 제안서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가면 될까요?”
유 차장은 두 눈을 멀뚱히 뜨고 입을 샐룩거리며 말했다. 김한겸 부장이 직접 작성한 제안서 초안이라 잔뜩 기대를 했는데 이력서만 편집된 문서가 나와 실망한 기색도 보였다. 역시나 그는 아직 감을 못 잡고 있었다.
“차장님, 이게 제안서예요.”
난 유 차장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이게 제안서라니, 그게 무슨 얘기야?”
“성 대리 말대로 이 이력서들이 제안서입니다. 특정 토픽을 제안하는 게 아니라 이 전문가들과 논의하면서 토픽을 뽑아 보자고 세미나를 제안하는 거죠. 여기 이력서만 봐도 어떤 논의가 진행될지 그려지지 않습니까?”
애쉬 헤이우드: 뉴욕대 경영학 박사, 어센트 북미 통신산업 및 글로벌 성장전략 센터 대표. 크로스보더 (Cross-Border) M&A, JV (Joint Venture, 합작투자) 전문
진 에크만: 스탠퍼드 공대, 하버드 MBA, 어센트 버라이즌 어카운트 담당 부사장. 클라우드 전략, 4G 네트워크 전략, IP기반 스트리밍 서비스 전략 (게임, VoD, 뮤직 등) 전문
조나단 크레이머: 노스웨스턴 공대, 시카고 대학 MBA, 어센트 보다폰 글로벌 어카운트 담당 부사장. M&A, 신사업 전략, 경영 혁신 및 운영 효율화 전략 전문
제롬 베누와: 일리노이대 전자공학 박사, 어센트 차세대 무선통신 시스템 연구소장. 차세대 BSS (Business Support System, 영업 지원 시스템), OSS (Operations Support System, 운영 지원 시스템), SDP (Service Delivery Platform, 서비스 플랫폼) 전문
한 명당 한 장씩 작성된 이력서에는 개개인의 학력과 그들이 수행했던 프로젝트 목록이 정리되어 있었다. 몇 개 프로젝트 목록만 훑어봐도 이들의 커리어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이력서 몇 장을 훑어보다 문득 내 눈길이 가는 건 ‘하버드 MBA’ 나 ‘버라이즌 비즈니스 클라우드 사업전략 자문’ 같은 타이틀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아차. 나도 똑같구나!
결국 보게 되는 건 타이틀 밖에 없었다. 난 내 옆에서 아직도 감을 못 잡고 서 있는 유 차장을 쳐다봤다. 그의 머리 위로 '코넬대 MBA'란 타이틀이 떠올랐다. 내 머리 위로 떠오를 건 ‘한국대 물리, 수학 복수전공‘이란 타이틀과 1년 남짓한 어센트 근무 경력이 전부였다. 유 차장의 타이틀에 합당한 연봉은 1억이었고, 내게 합당한 연봉은 딱 그 절반 수준이었다. 실제 업무 역량은 아무 상관없었다. 보이는 건 타이틀들 뿐이었다.
아주 잠시, 현기증이 나도록 수많은 생각들이 쏟아졌다. 본질적 업무 역량과 이력서 사이엔 어떤 필연적 연결고리도 없다. 하지만 우린 이력서를 읽으며 연결고리를 가정하게 되고 또 그 가정에 기반해 연봉을 책정한다. 결국 내가 어떻게 인식되고 평가되느냐도 내 역량 중 하나였다.
난 그렇게 보이는 역량은 생각도 못한 채 엑셀이니 파워포인트니 하며 내가 잘하는 것에만 빠져 있었다. 달리기를 아무리 잘해도 러닝머신 위에선 제자리에 머물 뿐이었다. 거북이걸음이라도 밖으로 나와 경기에 출전하고 다른 선수들과 그리고 세상과 부대껴야 했다. 우승자 타이틀, 아니 경기 참가자 타이틀 하나도 없이 내 실력을 인정해 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언제나 제자리에 머물려는 관성, 그 관성을 타파해야 했다. 한편으론 여전히 내가 관성에 속박되어 있다는 실망감이 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경외감도 밀려왔다. 이력서들을 보며 내가 이런 이들과 프로젝트를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놀랍고 흥분되는가 하는 생각에 말이다.
연구실에만 처박혀 있던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난 겨우 세상 밖으로 한 발을 내디뎠을 뿐인데 이토록 경이롭고 놀라운 세상을 마주하고 있었다. 여기서 한 발을 더 내밀고 또 내밀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다시 희망회로가 돌기 시작했다. 무언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더 나아갈 미래가 있고, 발전할 기회가 있다는 것, 꿈꿀 수 있다는 것이 기쁨으로 다가왔다. 그렇다. 꿈꿀 수 있을 때 마음껏 꿈꿔야 했다. 그리고 그 꿈을 위해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나는 김한겸 부장을 돌아보며 날아가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건 정말 반전인데요. 토픽이 아니라 사람으로 제안을 하자는 거잖아요. 외인부대 작전이라고 할까요? 여하튼 대단합니다.”
“외인부대 작전? 흠. 괜찮네요. 근데 이 전략을 만든 대단한 사람이 저는 아니에요.”
“아, 그럼 임정혁 부장님이—”
“아니요. 정주성 상무예요. 아, 진급하셨으니 이제 전무라고 불러야겠네요. 이건 정주성 전무님이 아니면 생각할 수도 없는 전략이죠. 정 전무님이 그동안 대한통신과 온세통신 프로젝트를 하면서 글로벌 통신 전문가들과 인맥을 많이 쌓아놨거든요. 이 인력들을 한데 모으는 건 정 전무님 아니면 불가능했을 거예요.”
머리에 찬물을 끼얹은 듯 한껏 달아오르던 흥분이 단숨에 꺼졌다. 젠장. 정 상무, 아니 정 전무라니. 대한통신 프로젝트 후 정 전무와 정면으로 부딪힌 적은 없지만 언젠가 마주치게 될 가능성은 농후했다.
전략 프로젝트의 절반이 전자통신 분야고, 정 전무가 전자통신 업계의 모든 IT 프로젝트를 담당했으니 엮이는 건 시간문제였다. 전략에 들어온 후로 정 전무를 볼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는 지평선 끝자락에서 언제라도 들이닥칠 듯 부유하는 먹구름처럼 내 시선에 아른거렸다.
“앞으로 정 전무님 행보가 흥미로워질 겁니다. 현대통신을 뚫게 되면 국내 통신 3사를 전부 클라이언트로 가져가는 거니까요. 어센트 아태 사무소뿐만 아니라 글로벌에서도 눈여겨볼 거예요. 이제 전무 진급을 했다지만 부사장 되는 것도 시간문젤 겁니다. 그만큼 한국 사무소나 저희 전략 조직에도 도움이 될 거고요. 그러니 이번 제안서는 특별히 신경 좀 써주세요.”
김한겸 부장은 나에게 마무리를 부탁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 전무의 행보라… 김한겸 부장은 무심히 던진 말이었지만 내 마음은 바윗덩이를 던진 듯 출렁였다. 나는 전략 프로젝트에 자꾸 정 전무가 엮이는 게 싫었다. 정 전무의 영업방식은 일관됐다. 전략이나 프로세스 조직에서 고객사 하나를 뚫으면 그는 들소처럼 돌진해 고객관리, 네트워크 운영, 공급망 관리처럼 IT 시스템에 기반한 전사 혁신 어젠다를 들이밀었다.
그게 대규모 프로젝트를 띄우고 매출을 극대화할 수 있는 최적의 접근이긴 했다. 문제는 대규모 IT 프로젝트가 뜨고 나면 모든 리소스가 IT에 집중된다는 점이었다. 컨설팅의 꽃이어야 할 전략이 받을 스포트라이트는 없었다. 정 전무에게 전략 프로젝트는 대형 프로젝트를 띄우기 위한 미끼에 불과했다.
이번 프로젝트만 해도 전략 주도로 현대통신과 관계를 뚫고 나면 어김없이 IT 어젠다를 들고 와 덮칠 것이다. 그의 세상에서 전략으로 커리어를 키울 방법은 없었다. 그의 영토가 확장될수록 어센트는 IT로 물들어갈 뿐이었다.
이주완 대표는 어쩌자고 자꾸 정 전무에게 주도권을 내주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이 상황에서 탈출할 유일한 탈출구는 MBA인지도 모르겠다. 눈치 빠른 치수가 일찌감치 MBA를 염두에 둔 것도 이런 상황 때문 아니었을까?
머리가 복잡해졌다. 난 분명 성장했고, 더 크게 성장해 정 전무가 가장 필요로 할 때 그에게 일격을 가하리라 다짐까지 했는데, 정 전무는 나보다 더 빠른 속도로 힘을 키우고 세를 넓히고 있었다. 나로서는 범접할 수도 없는 철옹성을 쌓으며 말이다.